티스토리 뷰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 김광규(1941∼ ) 부분

 

시는,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로 이어진다. 문민정부 세대에게 <응답하라 1994>가 있다면, 4·19세대에게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만남 그 이후는 이하동문이기에 이하생략이다. 회비를 내고, 명함을 주고받으며, 배우자와 자식들의 안녕을 묻고, 주가와 물가를 걱정하고, 대출과 건강 정보를 공유하고, 정치인과 연예인을 씹으며 적잖은 술과 안주와 노래를 나눈 후 제 몫의 귀가전쟁을 치르며 헤어졌다. 넥타이(하이힐) 부대의 대동소이한 세밑 송년회 풍경들이다.

어제도 우리는, 돈을 내고 노래를 불렀다. “그 슬픔에 굴하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목청껏 불렀다. 강물 같은 노래를 잊지 않았기에 서로의 어깨를 겯고 울력했다.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가는 길,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들을 지나 ‘부끄럽지 않냐’며 채근하는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이렇게 흥얼거렸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정끝별 시인·문학평론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