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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gazeman@khu.ac.kr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상대방을 제압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인간의 집착을 야만으로 보았다. 이런 선상에서 그는 정치권력을 근본적으로 야만의 한 형태로 여겼다. 


특히 대지주 귀족계급이 군부와 관료를 장악한 채 전횡을 부린 19세기 말엽의 독일제국을 보면서 그러했다. 니체는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보지 못했으나, 독일제국은 국민을 야만의 극한인 전쟁(제1차 세계대전)으로 내몰았다가 해군 병사들의 봉기로 시작된 11월혁명에 의해 결국 붕괴되었다.


 1980년 5월17일, 전두환 신군부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들은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을 중단시켰고 김영삼과 김대중 등 유력 정치인들을 가택연금하고 연행했다. 민주 인사와 학생들도 대거 체포했다. 


전국의 각 대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으로 민주화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는 국민의 기대가 고조되었던 시기, 즉 ‘서울의 봄’이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로 허무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두환 신군부가 자행한 야만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전두환 신군부에 저항한 수많은 시민이 학살당함으로써 한국전쟁 이후 우리 현대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5·18 광주’가 일어난 것이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경향신문DB)



결국 전두환 신군부는 5·18 광주를 거쳐 국가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야만의 극치였다. 사회 정화와 정의 구현의 이름으로 집권 초기에만 1000여명의 학생과 수백여명의 교수, 700여명의 언론인과 수백명의 노동자 등 수많은 사람들을 학교와 일터에서 쫓아냈다. 전국 경찰서에 할당량을 배정해 3000여명을 구속하고 4만여명을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그 중에는 순화교육 명목으로 끌려간 노동운동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야만스러운 권력 역시 ‘붕괴 비슷한’ 길을 걸어야 했다. 이미 5·18 광주에서 목도한 바 있는 시민항쟁은 1980년대 내내 수많은 이들의 자기희생에 바탕한 반독재 민주변혁 투쟁을 거쳐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군부독재 정권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은 성고문과 물고문으로 젊은 대학생의 영혼을 파괴하고 살해한 군부독재 권력의 야만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집권 초 40%대였던 물가상승률을 3%대로 안정시키고 마이너스 1.9%였던 경제성장률을 연평균 10%대로 올렸음에도 소용없었다. 86년 아시안게임을 개최하고 88년 올림픽을 유치했어도 그러했다. 국부의 증진과 국가 위상의 강화라는 화려함으로도 학살자의 멍에를 벗을 수 없었던 것이다.


2012년 5월17일, 한국 사회는 ‘또 다른 야만’을 목도하고 있다. 비례대표 경선 부정으로 내홍에 빠져들어 폭력사태마저 겪은 통합진보당의 현실이 그 중 하나다. 제국주의와 독재정권의 야만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권력의 윤리’에 대한 버트런드 러셀의 사색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부정투표와 폭력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권력에 집착하는 패권주의는 ‘타인과 조화를 이룰 수 없기에’ 야만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승패 결과에 대한 승복을 가져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증오와 냉담과 무기력마저 느끼게 한다. 


32년이 지난 5·18 광주에서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애국가라도’ 함께 목놓아 부르며 스스로 총을 들고 군부독재의 야만에 맞섰던 ‘인간’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군림하지 않으며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가진 것을 나누었던 ‘해방 광주’이다. 그때 그들에겐 이념의 노래도, 권력의 완장도 없었다. 


하지만 그곳엔 ‘인간의 정치’가 있었다. 야만의 운명인 붕괴 위기에 처해 있는 진보정치가 다시 불러내야 할 것이 바로 그 인간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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