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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재 | 언론인
통합진보당이 혼돈의 수렁에 빠져 있다. 분란의 소용돌이는 날로 거세지는 듯하다. 대화 통로는 없고 퇴로는 막힌 형국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초리는 곱잖다. 적어도 도덕성에 관한 한 여느 정당들을 압도했던 터다. 그 진지성을 믿었던 순수한 지지자들조차 비판적이다. 더러는 배신감을 느낄 법하다. 한쪽에선 야권 대연합의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12월 대권 향방에 애다는 정파들의 주판알 튀기는 소리도 요란하다. 통합진보당 사태 파장은 12월 정치게임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필자는 통합진보당 사태의 본질을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책임의 소재를 따질 생각도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사태를 바라보는 민심이 싸늘하다는 점이다. 적어도 불거진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과 자세는 민심과 동떨어졌다. 유권자 10% 이상의 지지를 받은 정당, 정치 발전의 한 축으로 인정받는 정당의 처신으로서는 적이 실망스럽다.
문제가 있다면 해소하는 게 순리다. 더구나 정권을 목표로 하는 대중정당이라면 투명하게 문제를 푸는 것이 유권자에 대한 도리다. 대화와 합리적 노력을 배제한 극한적인 다툼을 대중은 이해하지 못한다. 내부 문제의 복잡성, 계파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대중과 무슨 상관인가.
일러스트 ㅣ 김상민
▲ “진리는 언제나 간명하다.
문제 해결엔 명쾌한 행동거지가 필요하다.
부질없는 말장난, 지루한 이론 다툼에 대중은 관심 없다.
통합진보당 내부 정파들이여,
우선 얼굴을 맞대고 수습책을 모색하라.”
어쩌면 옛 선인들의 가르침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주역>은 오늘도 살아 있는 인류의 스승이다. 더구나 <주역>은 진보정신의 요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진보정당이 곱씹어볼 고전이라고 믿는다. <주역>을 관통하는 세 개의 키워드는 ‘변화, 음양, 순리’다. 특히 그 으뜸은 변화에 있다. 무릇 세상만사는 변한다. 하늘의 기운도, 사람의 운명도, 나라의 성쇠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변한다. 아무리 강고한 성채도 무너지는 날이 있고, 쥐구멍에도 언젠가는 볕 들 날이 있다. 동식물의 세계나 사람이 움직이는 조직에서 일어나는 발전과 도약, 변신과 진화는 이 ‘변화 메커니즘’의 산물인 셈이다. 시대의 모순을 깨고 새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정신의 아름다움 아닌가. 오늘 저 높은 기득권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르기 어려운 성벽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정신의 핵심 가치 아닌가.
<주역>의 핵심인 팔괘는 전설상의 제왕, 복희씨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 문자가 없던 시절인 5000년 전,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개의 변수를 음과 양으로 파악한 통찰력은 참으로 경이적이다. 첨단 과학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그 통찰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빛과 어둠, 암컷과 수컷, 작용과 반작용, 선과 악, 부자와 가난뱅이 등등 세상을 이해하는 간명한 도구로서 음양론은 유용하다.
자연현상과 인간관계에 존재하는 복잡 미묘한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꿰뚫어 본 혜안이 놀랍다. <주역>은 인류 최초의 독창적인 저작물로 꼽을 만하다. 문자가 없던 시절, 체계적인 이론이나 선생님도 없던 시절의 작품이다. 때가 되면 태양이 떠오르고 지며, 어김없이 사계절이 오고 가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하늘의 섭리를 터득해 낸 것이다. 오늘 첨단 디지털 과학의 뿌리가 음양론으로 연결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컴퓨터에서 통용되는 셈법인 2진법이, 오로지 0과 1로 이뤄진 것은 우연한 일치인가.
‘변화’에 ‘음양’이 결합하면 한층 오묘한 세계가 열린다. ‘음’이 극한에 이르면 ‘양’이 되고 ‘양’이 임계점을 넘으면 ‘음’으로 바뀐다는 게 <주역>의 시각이다. 자칫 허무맹랑한 견해로 들릴 법하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그 실례를 얼마든지 확인한다. 오늘 입은 손해가 언제까지 손해이며, 오늘 얻은 얄팍한 이익이 정녕 고스란히 이익으로만 남는가. 때로는 오늘 손해를 보더라도 통 큰 양보를 하면 내일의 큰 이익이 되어 되돌아오는 게 세상의 이치다. <주역>은 ‘잘나갈 때 겸손하고 또 겸손하라’고 곳곳에서 가르친다. 대역전극은 프로야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따금 인생역전의 드라마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곤 한다.
<주역>의 유일한 스승, 자연의 메시지는 ‘순리’였다. 순리는 곧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이었다.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는 하늘의 응징을 받고, 인간의 지나친 욕심은 헛된 꿈으로 끝나는 게 세상 이치임을 터득했을 터다. 욕심 많은 사람들 사이의 복잡한 문제의 해법도 ‘무엇이 순리인가’라는 화두 앞에서 고뇌할 때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야만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순리’가 강조된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니, 너도나도 각박한 산술과 작은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오늘이야말로 순리가 필요한 시대다.
염치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활개 치는 정치판에서 순리는 효과적인 무기이자 아름다운 덕목이다. 순리는 무지렁이도 이해하는 법도다. 끼리끼리만 배타적으로 용인하는 주의·주장은 순리가 아니다. 헤게모니 싸움, 패권 다툼은 부질없다. 공격하는 쪽이나 공격당하는 쪽이나 순리 대신 정치공학의 힘을 빌린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당의 깃발을 달고 민중의 바다에 뛰어든 이상 민심의 요구를 묵살할 수는 없다. 민의의 바닷물이 노여워하는 데 항해길이 어찌 무사하겠는가.
진보정당의 책무가 무겁다. 정치지형과 정치문화 발전의 변수로서 국민적 기대가 고조되고 있는 터다. 그러나 진보정당은 아직 그 튼실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조·중·동’의 사냥감이 되어 조롱의 대상으로 떨어진 것은 비극이다. 내부 헤게모니 다툼의 승리가 대수로운 일인가. 찻잔 속 싸움의 승리가 우선일 수 없다. 대중의 바다에서 통 큰 승부를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연습이 필요할 때다.
자연의 이치나 사람의 도리는 간명하다고 <주역>은 가르친다. 진리는 언제나 간명하다. 문제 해결엔 명쾌한 행동거지가 필요하다. 부질없는 말장난, 지루한 이론 다툼에 대중은 관심 없다. 통합진보당 내부 정파들이여, 우선 얼굴을 맞대고 수습책을 모색하라. 어떤 것이 됐든, 합의안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통합진보당의 활로는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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