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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동화작가


지난 16일 한 일간지에 자극적인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부역자 추모사업 조례를 폐기하라!’ 그 전날인 15일, 경기도의회는 임시회 본회의에서 광역의회에서는 처음으로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지원 등에 관한 조례안’을 통과시켰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때 희생된 민간인에 대한 지원사업 등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권고한 지 5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길한 단서가 붙어 있었다. 김문수 도지사가 재의를 요구할 경우, 도의회는 재의결 절차를 밟아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례안을 가결할 당시 찬성 63표에 반대가 40표였다. 재의결에 들어간다면, 조례안이 무위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며칠 뒤 한 지방 일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경기도는, 전쟁 희생 민간인 지원은 국가 사무이며 민간인 부역자들이 실제 인민군에 협력했는지 어떤지 선별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이유로 재의를 요구하겠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경기도 측에서 ‘부역자’라는 표현을 쓴 것인지, 이 신문이 임의로 그런 표현을 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됐든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 아직도 거침없이 ‘부역’이라는 말을 쓰는 기사에 대해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 무식하니까 용감한 것일 수도 있겠다.

‘부역’의 사전상 의미는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하는 일’이다. 그리고 ‘반역’이란 나라와 겨레를 배반하는 일 또는 통치자에게서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빼앗으려 하는 일이다.

한국전쟁 기간에 한국인 사망자는 대략 100만명에 달하며 그중 85%가 민간인이라고 한다. 한반도에 투하된 폭탄 수가 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폭탄 수와 같다는 설도 있을 정도니, 민간인 희생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조직적으로 학살된 경우만 보더라도, 국민보도연맹만 그 희생자가 최소 2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거창에서는 빨치산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을 주민 700여명이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밖에 전세가 이쪽저쪽으로 기울 때마다 애꿎은 보복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소속 한 회원이 울부짖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그런데 그 수십만의 억울한 죽음으로부터 어느덧 반 백년이 훌쩍 지나버린 오늘날에 이르도록 세상의 누군가는 그들을 부역자라고 부른다. 나라와 겨레를 배반하는 일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한국전쟁 민간인에 대한 지원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감히 그들을 일러 ‘부역’이라 부르는, 무식하니까 용감한 말들을 교정하는 것으로부터. 60년 세월 동안 비명조차 질러보지 못했던 희생자와 유족들에게서 부역이라는 덫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경기도는 전쟁희생 민간인 지원사업을 국가차원의 일이라고 했단다. 맞는 말이다. 국가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일이다. 진짜 ‘부역자들’ 그러니까 전쟁의 와중에 제 잇속을 차리며 겨레를 학살한 자들을 낱낱이 밝혀내야 한다. 전쟁과 독재의 서슬에 짓눌려 있던 그 죽음들의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경기도가 그 첫발을 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경기도의회가 조례안을 통과시키던 날, 그 자리에 참석한 유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쉽사리 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언론은 유족들에게 부역자라는 언어의 돌팔매를 던졌다. 경기도는 그 서러운 눈물을 향해 재의를 요청하겠다는 의지가 굳건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밖의 세상은 무관심하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지원 조례안이 통과된 소식도, 그 조례안이 좌초하고 있다는 소식도 언론에 제대로 보도조차 되지 못했다.

경기도의회가 재의결을 통해 반드시 지원 조례안을 통과시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른 지자체도, 중앙정부도 한국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일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모두가 한번쯤 돌아봐주었으면 좋겠다. 다가오는 6월, 아직도 부역이라는 덫에 걸려 있는 수십만의 그 죽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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