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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 대중문화평론가


 

돌이켜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노래를 가지고 별별 일을 다 한 대통령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에게는 ‘베사메무쵸’가,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상록수’가 떠오르지만 그건 그저 그들의 애창곡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리면 수많은 노래들이 머릿속에서 엉킬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그는 노래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이해하는 대통령이었다. 5·16 쿠데타 1주년 기념식에 주문제작한 ‘잘 살아 보세’를 발표해 국민적 애창곡으로 만들었다. 쿠데타 수뇌부가 작사자로 방송극작가 한운사를 낙점까지 했다니 놀라운 혜안이다. 이후 박정희 시대 내내 공공단체와 방송국 등이 추동하여 많은 건전가요들이 쏟아져 나왔고, 길옥윤 작 ‘서울의 찬가’, 신중현 작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 적지 않은 노래가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노래를 작사·작곡하여 전 국민에게 부르도록 했다. ‘나의 조국’과 ‘새마을 노래’가 그것이다. 유신시대 내내, 텔레비전에서는 애국가에 뒤이어 두 노래가 나온 후에야 방송이 시작되었다. 국립합창단의 ‘나의 조국’ 뮤직비디오는 애국가 못지않게 웅장하여,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 한라산에 높은 기상 이 겨레 지켜왔네’란 대목에선 여지없이 백두산과 한라산을 보여주는 식이었다. 내 또래들은 지금도 3절까지 입에서 줄줄 나올 만큼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 대학에 들어가 보니 선배들이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10월유신 없었으면 이 나라 망했겠네’ 식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며 킬킬댔다.



1958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 2004년까지 2,100여곡 발표. 가장 많은 노래를 가장 오랜 기간 불렀고 음반판매 수익이 가수 중 최고라는 기록을 갖고 있는 대중가수. 유신정권 시절 '동백아가씨'는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기러기 아빠'는 가사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금지곡 반열에 올랐다. (1941.10.30 - ) (경향신문DB)



‘새마을 노래’를 제쳐놓고 하필 이 노래가 야유의 대상이 된 것은, 이 노래가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력이 없는 ‘올드패션’의 선율로 되어 있었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이 노래는 일본식 ‘라시도미파’의 5음계로 이루어진 것으로, 트로트와 동일한 음악언어를 쓰고 있다.(목소리를 꺾으며 느린 템포로 불러보면 영락없는 트로트이다.) 1917년생으로 트로트와 일본 군가의 전성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을 그가 이런 일본색의 노래를 구사했다는 것은, 할리우드 키드들이 할리우드 감각의 영화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애창곡도 트로트의 원조 격인 ‘황성 옛터’라지 않는가. 하지만 그의 집권기 내내 ‘동백 아가씨’ 등의 트로트 곡이 ‘왜색가요’로 낙인 찍혀 금지곡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런 걸 보면 박정희 정권기의 금지곡이란, 트로트의 일본색이 문제라서, 혹은 가사가 정말 퇴폐·불온해서라기보다는, 그런 금지곡을 몇 개쯤 만들어놓는 것의 사회적 파급력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윤리위원회가 발표한 대로 김추자의 ‘거짓말이야’가 ‘불신 조장’을 한다고 금지했다면 너무 우습지 않은가. ‘고래사냥’의 금지 사유인 ‘시의에 적절치 않음’은 또 뭐란 말인가. ‘라라라’(‘조개껍질 묶어’)는 길옥윤 작 ‘사랑이란 두 글자’의 표절이라는데, 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금지곡으로 묶고, 대마초 사건을 대대적으로 터뜨려 인기가수들을 5년 동안 완벽하게 퇴출시킨 조치는, 확실히 사회 전체를 군기 잡는 효과로는 만점이었다.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 한두 놈만 대표로 세게 ‘빠따’를 치면, 모두 고분고분해지는 효과라고나 할까. 그 ‘한두 놈’을 대중적 파급력이 높은 대중가요로 선택했다는 것 역시 정말 탁월한 판단이었다. 정말 노래가 뭔지 아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수많은 금지곡들은 1987년 6월항쟁으로 제5공화국 정권이 무너진 이후에야 풀렸다. 그 금지곡들을 모아, 10월유신 40주년과 6월항쟁 25주년을 기념한 ‘금지곡 콘서트’를 홍대앞과 정동에서 연단다. 참, 올해는 이래저래 기념할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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