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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님.

졸저, <가장 사소한 구원>에 보여주신 관심과 평에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경향신문을 통하여 저에게 공개서한(1월22일자 29면)을 보내주시었는데 진작 답을 드리지 못한 것에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일찍이 칼럼니스트인 김경은 라종일 교수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적이 있었다. (경향신문 캡쳐본)


별로 하는 일이 없이 지내는데도 매일매일 정신없게 지내다 결례가 되었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김경님의 글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책에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저는 이 책의 출판을 반대하였고 여러 가지 압력(!)에 동의를 한 후에도 끝까지 유보적인 심경이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학자나 혹은 어떤 작가가 자신만의 공간에서 작업을 할지라도 그 작업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공적인 것이라고 여깁니다. 특히 물질적인 혹은 사회적인 비용이 많이 드는 출판은 공적인 차원에서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 저술은 그 내용이 저와 김현진 작가의 사적인 대화였습니다. 저는 이런 사적인 문서가 어떻게 공적인 혹은 사회적인 의미가 있겠는가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김현진 작가나 출판사 측은 이 책이 공적으로도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씀으로 저를 설득하였습니다. 출판 이후에도 마음속에 여러 가지 불편한 생각이 있었는데, 김경님의 글을 보고는 이런 마음의 부담을 크게 덜 수 있었습니다. 김경님이 공개서한을 쓸 정도라면 이 책이 조금은 의미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지적하신 두 가지 문제에 관하여서는 저도 전적으로 생각을 같이합니다. 우선 아기를 낳아 기르는 경험을 제가 강조한 점입니다. 저는 이것이 저나 혹은 저와 유사한 경험을 한 일부 사람들에게 국한된 일이며 일반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김현진 작가에게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 기르라고 권한 것은 특정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사적인 권유였고 모든 사람에게 저와 경험을 공유하자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저의 경우는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사석에서 흔히 이야기합니다만 육아의 경험이 없이도 모든 사람들에게 박애의 자세로 대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요. 테레사 수녀님 같은 분입니다. 이런 분들에 비하면 저는 오히려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다음으로 사형제 폐지, 여성의 지위 향상 정도의 일로 세상이 조금씩 좋아진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지적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항상 크게 불만족스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것이 사실입니다. 단지 저의 짧은 인생의 도상에서 경험한 것들에 비하면 현재가 상당히 달라진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일제강점기 말도 겪었고 해방 이후의 혼란과 한국동란 그리고 그 이후 민주화 과정을 경험하면서 일부 현실에 참여한 일도 있습니다. 멀지 않은 과거, 그 시절 우리 현실은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의 다른 저술에서 그 시기에 관하여 ‘폭력적인 부정의’ ‘폭력적인 갈등’의 사회라는 표현을 쓴 일이 있습니다. 특히 그 시기 사회적인 약자인 부녀자와 어린이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부정의가 생생한 1차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얼마 전 인권위원회에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쓴 방정환, 마해송 같은 분에게 5월 어린이날을 기해서 인권상을 수여하자는 건의를 한 일도 있습니다.

정치의 세계도 마찬가지였지요. 해방공간의 좌·우 대립도 주로 테러 형태였고 한 달 사이에 수백 건에 사망만 수십 명, 부상은 천 명 단위에 이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고 살아온 저의 세대와 경님의 세대 사이에 현실에 관한 인식이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단지 저는 현실이 아무리 불만족스럽다고 할지라도 이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신통한 해결책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런 약속을 하는 사람들을 매우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저는 우리들에 관하여서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하여서도 근본적으로 큰 기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노력에 의하여 조금씩은 세상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우리의 일상의 질이나 도덕적인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장황한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 주신(주셨다면) 것에 감사드리고 언젠가 뵙고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바랍니다.

라종일 | 한양대 석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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