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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이가 보고 싶어졌다. 우리 집 아이 주강이의 유치원 단짝이었고 지금은 다른 초등학교에 다니는 3학년생이다. 주영이에게는 형이 한 명 있는데 또래보다 키가 크고 탄력이 좋아 학교 축구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다. 주영이에겐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된 늦둥이 여동생도 한 명 있다. 주영이 아빠 프레디는 앙골라에서 태어났고 엄마는 강원도 땅에서 자랐다. 예전에는 밥도 함께 나눠먹고 연극도 함께 만들었으며 주영이와 주강이가 싸울 땐 상대 아이를 먼저 안아줬다. 곱슬머리 주영이는 귀여웠고 눈망울에 꿈이 가득했다. 둘은 사이좋게 놀다가도 싸우고 때리고 잡겠다고 도망다니곤 했다. 흙탕물 가득한 연못에 개구리 잡으러 들어갔을 때다. 까만 주영이 손과 누런 주강이 손이 그물처럼 한짝이 되어 수풀을 훑고 지나가면 러닝셔츠가 물에 젖고 까만 몸과 누런 몸이 햇살 아래에서 빛났다. ‘개구리다’ 소리치며 들어올린 것이 서로의 손이었고 뭐가 그리 웃긴지 둘은 나자빠지듯 연못 언덕에 널부러져 낄낄거렸다. 주영이 엄마는 강원도 음식을 자주 내왔고 프레디는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가며 맛깔스럽게 먹었다. 주강이는 프레디 손가락이 맛있어 보였는지 냉큼 빨아댔고 주영이는 울었다. 나는 주영이에게 손가락을 얼른 내주지 못하고 주저주저했다.

정부가 ‘국기 게양률을 높이고 광복 70주년인 올해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태극기 게양법” 개정에 나선다. 정부의 의도가 실현되면 모든 곳에 태극기가 휘날릴 것이고 국가가 지정한 몇몇 선열이 기려질진 몰라도 사실은 대부분의 국민은 선열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사는 아파트엔 목요일마다 알뜰시장이 들어선다. 칠레에서 물건너온 명태와 러시아에서 태어난 조기가 나란히 손님의 손을 쳐다보고 누워 있다. 번듯한 직장에서 근무하는 필리핀에서 태어난 엄마와 우즈베키스탄 산맥을 닮은 아빠가 사이좋게 물건을 고르고 산다. 충청도가 고향인 아빠와 인도에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 그리고 형제가 살고 있는 엄마가 충청도 말로 물건값을 흥정하고 인도 말로 사랑을 속삭인다. 평온하던 이들에게 아파트 단지 안 커다란 태극기가 보이고 그들은 서로를 한번 쳐다보고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을 또 한번 쳐다본다. 이들에겐 초등학생 아이가 있다.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와 일기를 쓰고 국기 게양대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야 한다며 엄마, 아빠 손을 끌어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게양대 앞으로 간다. 충청도 출신 아빠와 인도 출신 엄마와 충청도와 인도의 영혼을 닮은 아이가 나란히 선다. 인증샷 찍는 마음이 한편에서 찝찝하고 한편에선 멍하다. 태극기는 바람에만 나뿌낀다.

‘국기게양법’은 300가구 규모의 아파트 단지나 읍·면·동 한 곳을 지정해 모범을 삼겠다 한다. 이미 전국 지자체엔 ‘전 국민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추진단’이 생겼다 하니 한국인의 습관처럼 빨리빨리 속도 높여 일이 추진될 것이다. 여기에 국가 시책이니 사명감과 애국심까지 더해져 협조는 뒷전이고 한 명 한 명 저울에 달아 애국심을 눈금으로 읽는 편이 업무적으로 훨씬 합리적으로 보일 것이다.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을 우선 실시하게 되는 대상은 초등교 학생들이다. 태극기가 오르고 내릴 때마다 친구 얼굴과 손과 손가락의 위치를 부지불식간에 보게 될 것이다. 미국이 고향인 친구가 국기 게양식에 참석하지 않고 그냥 교실로 들어가는 모습은 마냥 부러울 수 있겠다. 필리핀 친구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가슴에 손 올리는 모습은 왠지 짜증나고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반듯하게 올라간 반장의 손보다 건성으로 삐딱하게 대충 올려 놓는 반에서 꼴찌하는 아이의 손이 더 예쁘게 보일 수도 있을 테다. 그 순간 내 손이 그저 나무토막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게양식에 참석할 때마다 친구 손의 위치를 보고 다문 입술을 보고 그동안 보이지 않던 목의 떨림이 보일 수도 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이 친구와 이웃과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의 생김새와 피부 색깔과 냄새를 맡으란 말과 어떻게 다른지 즐겁던 채플 시간이 괴로울 수도 있겠다.

국기 하강식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사람들(1978년) (출처 : 경향DB)


그래서 묻는다. 국기는 어디에 걸리는가. 농촌 마을에서 김 매고 사과 따던 이주노동자들은 어디를 보고 손을 올려야 하는가. 회사에서 방송국에서 치과에서 번잡한 명동거리 한복판에서 대형 쇼핑몰과 공항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이방인이 되고 관광객이 된다. 여기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지만 매 순간 소수점으로 찍혀 의미 없는 숫자로 지워지지만 이미 여기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수점으로 지워질 수 있는 의미 없는 숫자나 생각 없는 영혼이 아니다. 농촌과 도시 어업과 임산업에 넓게 걸려 있고 비정규직으로 이주여성으로 아이의 엄마와 아빠로 사위로 며느리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대형 기획사 프리랜서로 자본을 만들고 대기업 CEO로 한국인을 먹여 살린다. 쌍용차 굴뚝에 있는 내 목숨을 인도 기업 마힌드라가 쥐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다시 묻는다. 국기를 어디에 걸고 싶은가. 애국심을 잡아당겨 경제 옷고리에 걸어 두고 싶은가. 고무줄을 잡아당겨 자신의 내려간 지지율을 끌어당기려는가. 애처롭게도 둘 모두 실패의 카드다. 태극기는 글로벌 경제 안에서 자본을 쫓아내는 몽둥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100% 통합을 부르짖을수록 온 나라가 가로 세로로 갈기갈기 찢겨져 결국 100% 가루로 변하게 되는 현실에 맞닥뜨릴 것이다. 그것을 원하는가. 박근혜 정부가 ‘국기게양법’으로 얻을 건 게양대 위 펄럭이는 태극기뿐이며 잃을 건 전부다. 또한 이 법안에 대한 필리핀 출신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 그녀의 의견과 상관없이 박근혜 정부는 대다수 비국민을 잃었다.


이창근 |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정책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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