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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은 초등학교 취학연령을 2025년부터 만 5세로 낮추는 학제개편안의 부작용을 곧바로 간파했다. 정책 발표 후 처음으로 개장한 지난 1일 사교육 업체들의 주가는 일제히 강세를 보였다. 정부는 공교육을 살리고 학부모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이라고 강조했지만 수용자들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박순애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보충설명을 하고 공론화의 장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윤석열 정부의 1호 교육정책은 결국 학부모와 교사들의 반발로 나흘 만에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이 학제 개편을 논의할 시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초·중·고교와 대학을 어떻게 둘지, 각급 학교에 몇 살에 들어가 몇 년씩 다니게 할지 등을 정해놓은 학제는 공교육의 기본틀이다. 한번 정하면 오랜 시간 변화 없이 유지되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의 생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 학제는 ‘6(초등학교)-3(중학교)-3(고등학교)-4(대학교)’가 기본이다. 70여년 전 미 군정기에 도입됐다. 이 시스템이 우리 학생들에게 과연 최선이고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지에 관해서는 진지한 고민과 토론이 필요하다.

학계의 주류 의견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초등 6년 과정이 다소 길어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즘 어린이들의 지적·육체적 성장 수준을 감안할 때 초등 과정을 5년으로 단축하고, 6학년은 중학교로 편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주장이다. 초등 과정을 1년 줄이면 중학교를 4년으로 늘린 ‘5-4-3-4’나 고등학교를 4년제로 한 ‘5-3-4-4’ 같은 다양한 학제 설계가 가능하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5(초)-5(중·고)-5(대)’를 제시했다. 10년으로 초·중등교육을 마치고 대학에서 1년 더 공부해 전문지식을 쌓게 하자는 취지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유치원 교육을 기간학제에 포함시키는 ‘유-5-4-3-4’를 제안했다. 만 5세 유치원 취학을 의무화하고 초등학교를 5년으로 한 뒤 중학교 과정을 1년 연장하는 방식이다. 현재 유치원 교육은 국가가 공교육에 포함시켜 관리하고 있지만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학력 요건은 아니다.

‘학기제’ 개편도 논의할 만한 주제다. 미국·유럽은 물론이고 중국과 아시아,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9월 신학기제’를 택하고 있다. 겨울방학이 짧고 여름방학이 길며 새 학년이 9월에 시작한다. 한국은 ‘3월 신학기제’다. 여름방학이 짧고 겨울방학이 길며 3월 초에 입학식을 한다. ‘3월 신학기제’는 일제강점기의 유물이다. 궁핍하던 시대에 겨울 난방비 절약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한다. 한국에 오는 외국 유학생들과 외국으로 떠나는 한국 학생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그러나 새 학년 시작 시점이 달라 입학 및 편입 학년을 맞추기 위해 한 학기(6개월)를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윤석열 대통령이 박 부총리에게 학제 개편에 관한 공론화를 지시했으니 이번 기회에 신학년 시작 시기를 국제 표준 격인 9월로 변경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학제는 백년대계다. 일단 정해지면 바꾸기가 매우 어렵고, 바뀐 제도가 안착하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학제 개편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학제 개편이 과연 현시점에서 절실한가 하는 논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후 개편의 목적과 대상을 분명히 한 뒤, 법률 개정과 홍보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사전 계획과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시행 초기 혼란을 최소화하는 방안, 정책 변경으로 피해를 보는 계층이나 집단에 대한 지원 방안 등도 마련해야 한다. 대학 입시에 미치는 영향이 있는지도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예컨대 이번 정부 개편안이 그대로 적용되면 2025년에 만 5세로 취학한 어린이들은 초·중·고 12년 동안 학교 시험은 물론이고 대입 전형까지 한 살 많은 동료들과 경쟁해야 하므로 불리하기 짝이 없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 없이 개편안만 불쑥 내놓으니 학부모들로서는 당황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정책 의도도 순수하지 않았다. 교육정책을 표방했지만 이면에는 산업 인력 조기 양성에 방점이 찍혀 있다. 윤 대통령은 학제개편안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박 부총리에게 “교육부는 사회부처이자 경제부처”라고 말했다.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서 대통령과 교육부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은 궁극적으로 시민이 결정한다. 특히 학제 개편 같은 사안은 시민들의 실질적인 동의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교육정책이 밀실에서 결정되고 정부의 발표대로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는 것을 윤 대통령과 박 부총리는 명심해야 한다.



오창민 논설위원

 


 

연재 | 경향의 눈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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