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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역할은 시대와 사회경제적 상황, 집권 정파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시장의 자율성에 맡기는 소극적인 정부(작은 정부)가 있는가 하면, 국민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부(큰 정부)도 있다. 문재인 정부는 양극화 확대를 지적하면서 적극적으로 개선에 나설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런데 작은 정부가 ‘시장의 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면, 큰 정부는 ‘정부의 실패’를 초래할 수 있다. 정부의 지나친 시장개입은 공정성을 훼손하고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다.

2011년 이명박 정부 당시 알뜰주유소가 만들어졌다. 출발은 ‘국제 원유 가격과 국내에서 팔리는 기름 가격의 차이가 크게 난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는 원인을 정유사의 과점, 국내 주유소들의 담합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정부는 이를 바로잡겠다면서 직접 주유소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도로공사와 농협을 통해 기름을 대량으로 싸게 구매해 민간 주유소보다 낮게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알뜰주유소에는 세제지원 혜택까지 주면서 기름가격이 100원 낮은 주유소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나 당초 기대와 결과는 달랐다. 민간 주유소와의 기름값 차이는 20~30원 수준에 불과하다. 2015년 국감에서는 ‘알뜰주유소의 기름값 인하 효과가 없다’는 연구 결과가 공개되기도 했다. 오히려 일반 주유소보다 비싼 경우도 있었다. 알뜰 주유소의 기름값은 약간 저렴하지만 민간 주유소와는 달리 부가서비스 혜택이 줄었다. 시장이 혼탁해지면서 민간 주유소와 알뜰주유소 간에 책임공방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한 결과다.

이와 유사한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서울시가 추진하는 ‘제로페이’다. 제로페이는 스마트폰을 이용한 간편결제 시스템이다. 결제 방식은 체크카드와 같다. ‘통장잔액을 이용한 자금이체’다. 제로페이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영세자영업자 지원대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자영업자를 위한 각종 방안의 하나로 카드수수료 인하가 추진됐다. 그러나 곧 한계에 부딪혔다. 자영업자와 소비자 사이에 카드회사뿐 아니라 카드단말기를 설치하고 영수증을 수거하는 이른바 ‘밴사’들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간 단계를 생략해 소비자와 자영업 점포를 직접 잇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 제로페이다. ‘제로’라는 의미는 영세자영업자(매출 8억원 이하)에게 수수료가 없다는 뜻이다. 자영업자들은 고객이 카드로 결제할 경우 일정 규모의 수수료를 카드사에 내야 한다. 그러나 중간 단계가 사라지면서 자영업자들이 내는 비용도 없거나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객 입장에서는 주어지는 인센티브가 신용카드보다 적고, 이용도 불편한 게 사실이다.

정부가 자영업자들을 돕겠다는 선의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정부가 직접 플레이어로 나서는 게 맞는지 의문이다. 이미 제로페이와 유사한 간편결제 서비스를 하는 업체들이 20곳 이상 시장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제로페이처럼 자영업자들에게 수수료를 받지 않는 곳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혈세 낭비 논란도 있다. 지난해 말 제로페이 시범서비스에 들어간 서울시는 대대적인 마케팅 행사를 벌이고 있다. 서울시는 구청별로 목표 가맹점 수를 할당하고, 한 건에 1만5000원의 유치 수당을 지급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실적은 미미하다. 사업이 제대로 될지도 모르는 곳에 돈을 쏟아붓다보니 낭비라는 말이 나온다. 더구나 제로페이는 은행 전산망에 무임승차하는 형태다. 시스템 관리에 은행들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은행들은 공공기관에서 요구하니 마지못해 협조하고 있는 형국이다. 공기업이 아닌 은행에 언제까지 매년 수백억원에 달할 부담을 지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연초에 “제로페이가 성공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지방자치단체들도 속속 제로페이에 동참하고 있다. 제로페이의 확산을 위해 50만원 이내에서 후불제 기능을 추가하기로 했다. 물론 간편결제 시스템의 발전은 필요하다. 사용자의 편의성을 도모하고 인센티브를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민간의 몫이다. 

급할수록 정도를 찾아가야 한다. 이미 민간에 플레이어가 있다면 공정한 게임이 지켜지도록 관리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정부가 플레이어로 칼자루를 쥐고 경기장에 나서겠다고 하면 시장의 규율은 누가 잡을 것인가. 경기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선수 대신 심판이 ‘링’에 오른다면 결과는 뻔하다. 경기가 난장판이 되는 것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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