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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시기 동독과 서독 국민들이 경험한 ‘우리는 하나’라는 깊은 연대감은 국제적 상황이 통일에 대한 가망이 없어 보이는 시기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통일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회고록 <우리는 이렇게 통일했다> 서문의 한 부분이다. 때로 역사는 ‘희망’과 ‘낙관’의 힘으로 전진한다. 그의 ‘기억’은 격변 속에 있는 한반도 운명에도 의미심장하다.

북·미 정상의 하노이 담판은 28일 안타까움으로 막을 내렸다. ‘하노이선언’으로 명명될 공동서명식도 하지 못한 채 후일을 기약하고 두 정상은 헤어졌다. 지난해 6월12일 역사적인 싱가포르선언 이후 261일 만의 만남이었지만, 악마가 숨은 디테일은 끝내 넘어서지 못한 셈이다. 반세기 넘게 일상적 전쟁의 불안이 배회하던 한반도 운명이 변화하는 길 위에는 다시 구름이 드리우게 됐다.

하노이 담판 결과만큼이나 이로 인해 닥칠 우리 사회와 정치의 모습이 우려스럽다. 북·미 회담을 앞두고 “역사적 대전환”에 대한 기대와 “핵보유 협상”이라는 폄훼가 엇갈렸던 진보·보수의 거리를 더욱 벌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단절은 ‘이념의 분단선’처럼 명료하다. 독일과 달리 우리는 반도 남쪽에서도 ‘한마음’이란 연결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당장은 자유한국당 전당대회를 횡행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김정은 대변인이 아닌가”(황교안 신임대표) 같은 목소리들이 기세등등해질 터다. 하지만 그 또한 답이 아님을 모두 안다. 그토록 그들이 북핵을 우려한다면 북한이 핵능력을 키워갈 동안 어떻게 ‘통일 대박’ 같은 환상에 빠져 팔짱을 끼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한국당 모습은 한반도 평화·안보에 대한 대안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지층에 대한 선동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보수정치의 모습은 “김정은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이왕 김정은의 속마음을 재단할 양이면, 그에 기반해 정치노선을 정할 것이면 ‘긍정의 가정’에 기대야 한다. 그래야 출구와 목표가 보인다. 동유럽 소비에트의 몰락처럼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인생은 늦게 동참하는 자를 벌하리라.”

구소련의 개혁·개방을 추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9년 10월7일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 참석을 위해 방문한 동베를린에서 남긴 말이다. 한 달여 뒤인 11월9일 베를린 장벽은 극적으로 붕괴했다. 고르바초프는 세계사에 남은 그 충고가 실은 동독 지도자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고 했다.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을 감안하면 그의 고백은 예언이 됐다. 바이츠제커는 회고록에 “우리는 역사를 재촉해서도 안되고 놓쳐서도 안된다. 고르바초프에 따르면 책임 있는 정치는 역사의 방향을 제때 인식하고 인도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기록했다. 고르바초프의 역사적 선택이 없었다면 당시 ‘둠스데이 클락(지구종말의 시계)’의 초침을 빠르게 돌리던 미·소의 극한 대립은 인류의 재앙이 됐을 공산이 크다.

그렇다. 책임 있는 정치는 역사의 저류를 거스르는 게 아니라 순응하고 적극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 상황은 여러 ‘절박한 필요’들이 만나 만들어낸 것이다. 역사는 이런 필요들이 계기가 돼 필연으로 이행한다. 고사(枯死)의 상황을 탈출해야 하는 북한과 다시 전쟁만은 절대 안된다는 남측의 절실함, ‘제재·긴장의 쳇바퀴’를 벗어나야 하는 미국의 이해가 만난 절체절명의 기회다. 당장은 멈칫해도 포기할 수 없는 길이다.

국가 운명과 관련한 책임 있는 정치의 자세가 실상 거창한 게 아니다. 정치적 이해로 국민 마음을 갈라놓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것으로 불안을 더욱 키우지 않는 것이다. 국가 운명과 정치적 이해를 나눠 선동하고 분열시키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무책임이다,

실상 지금 시점에서 이 길의 끝은 누구도 확신하긴 어렵다. 김정은조차 모를 것이다. 그렇기에 북핵의 운명은 지금 종착역을 예단하지 말고, 북한이 연 공간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앞서 ‘방치된 10년’의 교훈에서 보듯 북한이 움직이는 것 자체가 기회다.

문재인 정부 때 일이라고 그것이 문재인 정부나 그들 세력의 성과로 기록되는 게 아니다. 후세 민심은 정확히 기억할 것이다. 이 국면에서 각 정치세력들이 어떻게 마음을 모으고, 희망을 키워, 운명을 개척했는지 말이다. 국가 운명을 ‘패거리의 이해’로 바꿔치기한 임진왜란의 동서 붕당의 참혹함이 대대손손 집단기억 속에 각인돼 있듯 말이다. 이건 “오로지 분단을 유지한 상태에서 반공 하나로 연명해온 집단”이란 의심을 받는 그 정치세력에 하는 이야기다. 역사의 변두리에서 의심으로 머뭇거릴 여유가 지금 우리에겐 없다.

<김광호 정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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