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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최근 ‘주민 투표’가 진행됐다. 경비원 인원을 줄일지를 묻는 투표였다. ‘자치관리’ 형태로 일하고 있는 22명의 경비원을 ‘용역관리’로 전환해 12명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경비원 10명을 줄이면 가구당 연간 35만원에서 최대 54만원의 관리비를 절감할 수 있다. 이 아파트는 앞서 경비원들에게 낮과 저녁에 각 2시간씩의 휴게시간을 보장하고, 야간근무도 폐지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경비원들은 ‘사람답게 살 최소한의 권리’를 되찾은 것이다. 지난 5일 투표결과가 발표됐다. 전체 598가구 중 83%인 499가구가 투표에 참여했다. ‘현행 유지’에 296가구가 찬성, 59%의 지지를 얻었다. 주민들은 ‘경비원과의 동행’을 선택했다. 조금씩 부담을 나누자는 양보가 있었고, 그 결과 주민과 경비원 모두 계속해서 함께 살게 된 것이다.

택시·카풀 업계가 출퇴근 카풀(승차공유)서비스 대타협을 이뤄냈다. 택시업계는 ‘일터’의 일부를 내주면서 혁신을 택했고, 카풀업계는 ‘제한 운영’으로 한발 물러서면서 디지털 플랫폼의 공유를 약속한 결과다. 기아자동차 노사도 8년 가까이 끌어온 통상임금 소송에서 양측이 한발 물러서면서 타협을 목전에 두고 있다. ‘갈등과 혼란 해소, 자동차 산업 위기 극복’을 위해 못 받은 통상임금을 덜 받는 대신, 향후 임금은 법원 판단에 따른 기준을 적용키로 노사가 합의한 것이다.

7일 더불어민주당 택시·카풀 태스크포스(TF) 위원장인 전현희 의원(오른쪽에서 네번째)과 택시·카풀 업계 대표자들이 국회 정론관에서 합의문을 들고 서 있다. 김영민 기자

한발 물러서고 부담을 나누면 다 함께 잘사는 ‘동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한국사회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내야 한다’는 경제원칙이 지배하는 사회가 됐다. 대립과 갈등은 그래서 끊이지 않는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에 사상 최대로 벌어진 소득 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의 자살률과 노인빈곤율, 최저 출산율이라는 숙제를 안겼다. 비정규직 양산, 위험의 외주화는 노동자의 ‘일터’를 불안하고 위험한 곳으로 만들었다. 영리병원은 의료공공성을 훼손하고 의료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일부 자립형사립고는 교육 기회의 불평등과 서열화를 낳는다.

‘다 함께 잘사는 나라’는 ‘최소 비용-최대 효과’라는 경제 원칙으로는 이룰 수 없다. 자유와 정치적 참여에서 모든 시민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다. 시민은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존중’은 교육·직업의 기회가 공평해야 하고, 기본생존권 보장이 가능해야 한다. 이런 존중은 복지국가에서 강화되는데, 자연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독일의 사회학자 알렉산더 페트링은 <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에서 복지국가를 자유·보수·사회민주주의 등 3개 유형으로 구분하면서 이 중 사회민주주의적 복지정책을 ‘가치 있는 목표’라고 주장했다.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는 세금을 통해 재원을 조달, 균등한 공공서비스 혜택을 국민들에게 제공한다. 소득불평등을 개선, 높은 수준의 탈상품화(개인이 노동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를 유지하는 것이 정책의 목표이다. 우리 헌법 제34조도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이 가리키는 복지의 지향점도 분명하다. 헌법은 “사회보장·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여성·노인·청소년·신체장애자·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국가에 명령한다.

우파와 신자유주의 시장론자들은 “복지의 확대는 근로의욕을 떨어뜨려 ‘의존 문화’가 확대되고 경제는 둔화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영국의 대처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실업수당 등 사회보장을 축소하고 국가의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가 어땠는가. 미국·영국 사회는 한때 실업률과 극빈층이 증가하면서 계층 간 대립과 분열로 홍역을 치러야 했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는 <대통령의 책읽기>에서 “복지국가의 건설 없이는 지속적인 경제성장도 사회통합도 불가능하다”며 “모든 국민이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이 없다면 복지국가는 실현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누구나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며, 일하는 부모가 회사 눈치 안 보고 아픈 아이를 위해 병가를 신청하고, 사교육비와 주거비 걱정을 덜 하도록 돕는 것이 복지국가가 할 일이다”라고 강조했다.

분당아파트 주민들은 ‘경비원과의 동행’을 위해 늘어난 비용 부담을 감내키로 했다. 택시·카풀업계와 기아차노사는 대화와 양보를 통해 ‘이익의 공유를 통한 동행’을 선택했다. ‘우리 모두 하나의 공동체’라는 인식이 대화와 양보를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에 반목과 대립으로 ‘벼랑 끝’에 선 우리 사회의 갈등 치유를 위한 해법이 존재한다.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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