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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자 의원의 이름을 알게 된 건 그가 국회의원 4년차인 지난해 4월이었다.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법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문제를 둘러싼 여야 간 충돌 과정에서 그는 자유한국당 100여명의 동료 의원들과 함께 문희상 국회의장실을 항의 방문했다. 문 의장이 방을 나가려 하자, 어디선가 들려온 “여성 의원이 막아야 돼”라는 말과 함께 임 의원이 두 팔 벌려 가로막고 나섰고, 문 의장은 한동안 이를 바라보다 임 의원 볼에 양손을 갖다 댔다. 한국당 의원들은 문 의장을 성추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이렇게 한국노총 여성위원장·부위원장 출신의 임이자는 노동전문가가 아닌, 느닷없이 몸싸움 의원으로 기억에 남았다. 연말엔 문 의장의 의장석 진입을 저지하던 한국당 이은재 의원이 문 의장을 팔꿈치로 치고 나서 “성희롱하지 마”라고 외치다 쓰러진 해프닝도 있었다.

막 내리는 20대 국회에서 여성 의원들에 대한 가장 강렬했던 시각적 이미지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것들이다. 성추행, 성희롱이라고 외치는데도, 분노보다 수치심이 밀려온다. 

남성 국회의원들의 여성 비하 발언 대응도 유감이다. 잊을 만하면 막말 대행진이 이어졌지만, 여성 의원들은 ‘함께’ 화내지 않았다. 자기 당엔 침묵했고, 상대 당을 비판할 때만 병풍처럼 둘러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20대 국회에는 300명 중 17%인 51명의 여성 의원이 있다. 적다면 적지만, 역대 최고 숫자다. 여성 의원 수를 한 명이라도 더 늘리자고 여성계 모두가 오랫동안 똘똘 뭉쳐 싸우고 밀어올린 결과다. 2000년 16대 국회에서 불과 5.9%(16명)였던 여성 의원 비율이 2004년 여성할당제 도입으로 17대에 13.0%로 뛴 이후, 더디지만 조금씩(13.7% → 15.7% → 17.0%) 늘었다. 그런데 정작 여성 의원들의 초당적 협력으로 뚜렷한 성과를 낸 기억이 딱히 없다. 탄핵 국면과 대선, 개헌 논의라는 상황 속에서 의정활동의 한계는 물론 있었다. 그래도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2018~2019년의 거센 미투 운동, 혜화역 시위 등으로 이어진 ‘역사적인 여성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여성 의원 최다인 20대 국회가 이렇게 끝나서는 안됐다. 미투 관련 법안들이 수없이 발의되긴 했지만 결실 없이 멈춰서 있다. 여성들이 뜨겁게 분노하며 진상조사를 촉구한 ‘장학썬’(고 장자연, 김학의, 버닝썬)이라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진실도 묻혀가고 있다. 각 당으로 흩어진 소수의 여성 의원들이 남성중심의 정치문화를 부수지 못하고, 당의 상황에 따라 움직이면서 여성정책은 후순위로 밀렸다. 물론, 더 큰 문제는 아재들이 장악한 지독히 남성중심인 국회 구조다. 미투 법안만 해도 여성가족위원회는 통과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막히고, 본회의의 벽을 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다시 총선을 앞두고 여기저기에서 여성을 불러낸다. 여성 관련 공약들도 쏟아진다. 3월8일 세계여성의날엔 각 정당이 한국 여성들의 열악한 지위에 대해 몰랐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이를 개선하겠다며 한마디씩 할 것이다. 그동안의 말잔치만으로도, 우리나라는 진작에 북유럽 저리 가라 할, 성평등 국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 현실이 그렇지 못한 건 약속을 지킬 의지가 애초에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주요 정당들의 외부 영입 여성 인사들을 보라. 권력형 성폭력이나 불법촬영 등 여성들이 실생활에서 민감하게 느끼는 위협과 제대로 싸울 인사를 찾기 힘들다.

3월8일을 목표로 진행 중인 ‘여성의당’ 창당 움직임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현재 5개 시·도당 당원 1000명씩을 모집 중인데, 여성주의 기치에 동의하는 10대에서 80대까지 모든 세대가, 시민들이 함께 뛰고 있다. 촉박한 시간에, 모든 게 설익은 상태임에도, 총선 전에 꼭 정당을 만들자고 나선 이유는, 거리마다 자발적으로 모였던 뜨거운 목소리들을 이대로는 사장시킬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고단하고 억울한 삶이 녹아 있는 각종 차별과 불평등의 숫자들을, 모든 폭력에서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 권리를 달라는 강남역과 혜화역의 메아리 없었던 호소들을 실질적인 제도와 법으로 개선해 나가겠다고 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지방선거에서도 여성 투표율이 남성보다 높았다. ‘여성의당’ 창당은 더 열심히 얘기하고 참여하는데도 바뀌지 않는 현실, 이제껏 여성 의제를 후순위로 미뤄놓은 국회에 대한 불신임이다. 남성중심 정치에 끼어드는 게 아니라, 아예 판을 바꿔 인구 절반, 유권자 절반의 몫과 권리를 찾겠다는 출발점이다. 새로운 정치가, 여성주의라는 해일이 몰려오고 있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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