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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횡단보도 턱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턱이 문제인지조차 알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장애가 없는 성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 횡단보도 턱이 큰 장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휠체어 장애인, 유아차를 이용하는 여성의 경험을 통해서다. 누구에게는 별일이 아니지만 누구에게는 엄청난 문제인 일이 참 많다. 누가 보느냐에 따라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문제가 보여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중요도나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누가’, 어떤 경험을 통해서 보는가는 의제를 설정하고 해결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의 핵이다.

국가공동체 내 다양한 구성원들의 삶의 문제를 정책 영역으로 들여와 제도적·공동체적 해결을 모색하는 정치의 출발점은 누구의, 어떤 문제를 정책 의제, 공동체의 문제로 삼을 것인가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도 마지막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는 없다. 그래서 정치에서 ‘누가’, 어떤 경험을 통해서 보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한국 정치는 비장애인, 이성애 남성, 특정 연령이나 학력, 직업에 의해 독점되어 왔다. 20대 국회만 살펴봐도 98.7%가 비장애인이고, 전문대졸 이상이며, 83%는 남성이다. 국회의원 평균 연령은 55.5세로 20~30대는 단 3명에 불과하고, 국회의원 6명 중 1명은 법조인 출신이다. 녹색당 청년 예비후보자들은 ‘넥타이 국회’로 규정하고,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상상력도, 급변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이해력도 부족하다”고 했다. 20대 국회에서 미투의 핵심 법안인 강간죄 판단 기준을 ‘동의’로 바꾸는 형법 개정과 다크웹, n번방 등 불법촬영, 성착취 문제 등은 결국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비장애, 남성 기득권 독점 정치구조에서 여성, 청년, 장애인, 소수자들의 삶의 문제, 불평등 문제가 제대로 다뤄질 리 없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 최근 만들어지고 있는 페미당, 여성의당 창당 흐름은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

국회의 구조, 정치의 얼굴을 바꿔 정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할 책무가 정당들에 있다. 정당들은 여성, 장애인, 청년을 인재영입 깜짝쇼로 활용하고 ‘살아 돌아오라’식 공천으로 소수자와 유권자를 기만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각 정당의 당헌·당규에는 성평등 실현과 여성의 30% 정치 참여 보장 의무 규정과 청년, 장애인 등 소수자 정치 참여를 위한 규정이 있다. 정당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당헌·당규를 지키길 바란다. 

다행히 아직 공천과정이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30% 여성 정치 참여 보장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지역구와 비례 후보 공천과정에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 시행해야 한다. 장애인, 청년 등 소수자 참여 역시 마찬가지다. 보여주기로 유권자의 마음을 사는 시대는 갔다. 실질적인 구조개혁만이 살아있는 정치를 만들고 유권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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