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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에서 패했을 때마다 나온 반성문의 8할은 “오만과 독선”에 대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권 출범 해에 치러진 2008년 18대 총선 정도를 빼고는 이변이 아닌 경우가 없었다. 여론조사에도 잡히지 않던 표심이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막상 뚜껑을 여는 순간 판을 뒤집어엎은 결과다. 이변의 연속에서도 검증된 철칙이 있다. ‘선거는 오만한 쪽이 진다.’

2016년 20대 총선은 여당인 새누리당이 대세를 잡고 있었다. 대통령 지지율이 40%를 유지하고, 새누리당 지지율은 더불어민주당의 2배에 달했다. 과반은 물론 개헌선까지 호언하던 새누리당은 그러나 제1당마저 빼앗기는 참패를 당했다. 오만과 독선의 끝장을 보인 소위 ‘진박’ 공천 파동이 결정타였다.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졌다는 것은 ‘남이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잘못해서’를 전제한다. 선거 뒤 새누리당은 국민 눈높이에서 패배 원인을 진단하고 해법을 찾자는 취지에서 외부에 집필을 맡겨 ‘국민백서’를 만들었다. 패배 원인을 계파·공천 갈등, 불통, 자만, 무능, 공감 부재, 진정성 부재, 선거구도 등으로 분석했다. 내린 결론은 “극치에 달한 오만과 불통이 패인”이다.

‘찌질하고 후진’ 야당 덕분에 총선 승리를 낙관하던 때인 지난해 11월 민주당 민주연구원이 ‘총선 승리 정당에는 혁신·미래·절박함의 3대 법칙이 있다’는 정책브리핑 자료를 냈다. 집권 후반기에 치러진 15대(1996년), 19대(2012년), 20대(2016년) 총선의 승패를 ‘혁신’ ‘미래’ ‘절박함’의 키워드로 풀이한 것이다. 앞의 두 총선은 인적 혁신과 미래비전으로 무장한 당시 여당이 구태와 과거에 사로잡힌 야당에 역전했고, 2016년 총선은 안하무인의 공천 막장극을 펼친 새누리당의 오만이 패배를 자초한 경우다. 이렇게 “선거 승리에는 태도가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불과 한 달 새다. 난공불락이던 ‘야당심판론’ 우위 여론이 무너졌다. 한국갤럽의 2월 정기조사 결과, 정권심판론이 야당심판론을 앞서기 시작했다. 스윙보터인 중도층에서 정권심판론이 급증한 때문이다. 구태와 퇴행에 젖어 있고, 게다가 분열 상태인 보수야당 덕분에 아무리 민주당이 잘못, 무리를 해도 역전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낙관론이 위협받은 것이다. ‘조국 사태’를 통과하면서도 굳건하던 민주당 대세론이 한 달 새 급격히 흔들린 셈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먼저 불가능해 보이던 보수통합이 어쨌든 성사됐다. 미래통합당은 분명 ‘도로 새누리당’보다 못하다(이준석 최고위원). 탄핵의 강은 건너다 말았고, 개혁보수의 길은 제대로 내딛지도 못한 때문이다. 지도부 등을 포함해 인적 구성은 새누리당 전성기보다 다양성이나 개혁성이 취약하다. 달라진 건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이 주도하는 인적 쇄신의 몸부림이다. 혁신의 바로미터로 지목된 TK(대구·경북) 물갈이의 물꼬가 트였고, 서울 강남권과 친박의 기득권 아성에도 균열이 가해지고 있다. 불안전한 통합에 이 정도의 쇄신만으로도 민주당의 우위가 퇴색된다. 화장 고친 ‘핑크 새누리당’만으로 효력이 사라질 정도로 민주당이 기대온 ‘야당 복’은 너무나 허술한 진지다.

필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홍의락 민주당 의원). 비판 칼럼 고발, 금태섭 의원 찍어내기와 ‘조국 선거’ 논란, 이른바 ‘추미애 리스크’ 등 잇단 악재가 공히 함의하는 바는 오만의 덫이다. 청와대 참모들의 무더기 총선 출마와 끊이지 않는 ‘진문’ 공천 시비도 마찬가지다. 총선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인물·정책·구도와 대통령 지지율, 국정 성과 등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게 집권 세력의 행태다. 역시 “태도가 결정적인 변수”다. 때론 무능에 눈감아도 오만에는 가차 없다는 게 역대 총선의 교훈이다. 본디 선거는 좋아해서 찍지는 않더라도 상대가 싫어서는 찍는다. 비호감도가 50%를 넘는 야당이 싫어서 민주당을 찍겠다는 여론이 높았다. 집권세력에 오만과 독선의 프레임이 씌워지면 달라진다. 총선은 결국 오만하지 않고 덜 잘못한 정당의 승리로 귀결될 터이다.

앞서 민주연구원의 정책브리핑에 숨겨진 진실이 있다. 특히 집권 후반기에 치러지는 총선에서 야당은 ‘여당 복’으로 이길 수 있지만, 여당은 ‘야당 복’으로 이길 수 없다는 점이다. 2012년 총선은 여당이 ‘잘해서’ 이긴 거고, 2016년 총선은 여당이 ‘못해서’ 야당이 승리했다. 지금의 민주당을 주체로 바꾸면, ‘야당 복’만으로는 이번 총선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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