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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 <오베라는 남자>의 주인공 오베는 독거노인이다. 강퍅한 심성을 지닌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대거리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이웃 주민이 도움을 요청하면 투덜거리면서도 해결사로 나선다. 오베는 ‘애국 노인’이다. 평생 국산차 ‘사브’만 탔다. 독일산 BMW를 모는 운전자와는 말도 섞지 않는다. 오베는 일은 제대로 못하면서 위압적인 공무원들을 혐오한다. 젊은 시절 오베는 성실한 철도회사 노동자였다.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못 쓰게 됐지만 특수학교 교사가 된 아내 소냐는 “죽지 않으려면 죽을 만큼 버텨야 한다”며 오베에게 삶의 의지를 북돋아줬다.

그런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뜨고 43년간 일한 직장에서 해고된 오베는 ‘고집불통 할배’가 됐다. 깊은 상실감에 빠진 그는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며 소냐 곁으로 가려 한다. 오베의 자살을 막고, 세상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젊은 이란인 부부와 이웃들이었다.

영화 <오베라는 남자> 스틸 이미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 다니엘도 아내를 잃고 혼자 사는 노인이다. 40년간 목수로 일한 그는 모범시민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위법행위를 한 적이 없다. 다니엘은 심장병이 악화돼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생계가 막막해진 그는 질병수당과 실업수당을 받으려 했지만 번번이 기각당한다. 까다로운 신청절차와 담당 공무원의 관료주의는 다니엘에겐 넘을 수 없는 벽과도 같았다. 가구까지 팔면서 버텨보려는 그에게 사회복지기관은 “가난과 질병을 증명하라”며 지원이 아닌 모욕을 준다. 영국 보수당 정권의 복지축소 정책은 다니엘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자존심마저 짓밟는다.

다니엘이 심장마비로 숨지기 전 고용센터에 제출하려던 항고이유서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달라는 절규가 담겨 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니다.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니다.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니다. 나는 개가 아닌 인간이다.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아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노인들의 삶은 고단함 그 자체다. 오베와 다니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국가에게 노인이란 나랏돈을 들여 보살펴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일 따름이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들이 차고 넘친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49.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34개 회원국 중 1위다. 노인 인구 절반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개발독재시대를 견뎌낸 노인들은 사회적 약자가 돼 주변부로 밀려난 지 오래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매주 서울광장에 집결하는 ‘태극기 노인’들은 다르다. 이들은 아스팔트 위에서 ‘억지탄핵 원천무효’ ‘탄핵을 탄핵하라’ ‘군대여 일어나라’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구호를 외친다. 태극기 노인들은 오베와 블레이크처럼 힘없고 나약한 어르신들이 아니다. 종북·좌파세력을 척결해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들을 ‘애국 보수노인’으로 부르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태극기 노인들은 ‘노켓일베’ ‘프리덤 뉴스’ 등 극우성향의 매체를 신뢰한다. “촛불세력이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 한다” “좌파언론은 남파 인민군들”이란 가짜 뉴스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다. 마음에 드는 뉴스를 골라 수용하는 ‘선택적 노출(selective exposure)’을 통해 집단적 자기방어기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탄핵 정국에서 숨죽이고 있던 친박 정치인들도 태극기 집회 때마다 연단에 올라 “잔인무도한 폭도들을 태극기의 힘으로 몰아내야 한다”(김문수 전 경기지사) “광장의 혁명은 대한민국 헌법을 파괴하자는 것”(이인제 전 의원)이란 선동을 일삼는다. 보수세력의 재결집을 꾀하려 태극기 노인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놓은 꼴이다.

오베와 다니엘은 노인들을 고독과 소외, 빈곤의 늪에 빠뜨린 국가와 사회에 분노했다. 하지만 태극기 노인들은 나라를 망친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고 있다. 애국이 아닌 망국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타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불쌍한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속았다”고 믿고 있는 태극기 노인들에게 촛불시민들이 해줄 말이 있다면 이런 것일 터이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박근혜는 능력도, 선의도, 진실도, 소신도 없었다. 거짓, 탐욕, 부당거래, 정치적 술수만 있었다. 국정을 비선 실세에게 맡기며 책임을 다하지 않았고, 떳떳하게 살지도 않았다. 박근혜는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국정을 농단한 범법자이자 피의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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