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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전태일(1948~1970)에겐 우리가 몰랐던 ‘꿈’이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기업, ‘태일피복’의 창업이다. 1969년 11월1일 일기에 미리 쓴 ‘개업 인사글’을 보면, 그가 그렸던 태일피복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본사는 철저한 품질 관리와 생산원가를 고객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고, 생산과정을 소개하여 드립니다. 고객 여러분께서는 생산원가에서 얼마간의 이익을 붙여 주시면 됩니다. 이윤은 기업주와 종업원이 공평하게 분배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인, 종업원을 건강부터 교육까지 철저하게 관리합니다. 본사의 모토는 정직입니다. 종업원을 기업주와 하등의 차이 없이 대우하고도 사업을 해나갈 수 있다는 기본을 보이기 위한 기업체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양심적이며, 실용적인 상품은 논할 것도 없으며, 모든 기업체의 모범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

당시 서울 평화시장 의류공장의 노동환경은 참담했다. 대여섯 평 일터에서 수십명의 노동자들은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 태반이었고, 환풍기도 없어 먼지가 가득했다. 노동자들은 폐병에 안질, 영양실조 등 갖은 질환에 시달렸다. 전태일은 이런 현실을 타개할, ‘동행의 일터’를 만들려는 꿈을 사업계획서에 담았다.     

서울시가 청계천 수표교 인근에 지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를 기념하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 기념관 정면에는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청하며 근로감독관에게 쓴 자필 편지가 패널로 붙어 있다. 서울시 제공

전태일은 1969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쓴 사업계획서에 ‘하루 8시간 근무 등 근로기준법 준수’ ‘사장에서 노동자까지 차별 없는 대우’ ‘이윤의 공평 분배’ ‘종업원 건강 보호와 교육’ ‘생산원가 공개’ ‘정당한 세금 납부’ 등이 이뤄지는 태일피복을 설계했다. 구체적 실행계획도 세웠다. 재단·재봉사는 3만원, 품질관리·배달 담당은 1만5000원, 재봉사 조수는 8000원의 월 임금을 받도록 했다. 그때는 시내버스 요금이 15원, 풀빵이 1원 하던 시절이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하면서도 재봉사 조수가 3000원, 재봉사가 1만원 정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파격이다. 밝은 형광등과 넓은 창, 환풍기가 있는 일터와 음악감상실·도서실·탁구대·농구대 등을 갖춘 휴게실도 조성할 계획이었다. ‘야간 기술학원’을 설립, 노동자 교육도 꿈꿨다. 전태일은 157명의 직원을 고용, 생산원가 공개로 가격 거품을 빼는 대신, 대량생산을 통해 이익을 키울 계획이었다. 서울시내 모든 의류점의 정보를 파악한 뒤, ‘월 1회 카탈로그 발송’ ‘오토바이를 활용한 주문 후 3시간 이내 배송’ ‘자동차로 고객 배웅’ ‘지역별 대리점 운영’ 등 전략도 세웠다. 매월 한차례씩 장학금·오토바이·피아노 등 사은품 증정행사도 기획했다. 

태일피복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전태일은 자신의 한쪽 눈을 희생할 각오로 자본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1970년 11월13일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뒤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꿈은 이뤄졌을까. 하루 8시간 근무는 그때나 지금이나 근로기준법에 분명하게 적시돼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법이 정한 ‘주 40시간’도 아닌 ‘주 52시간 노동’을 이야기한다. 경영계는 이마저도 부족하다며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 혹은 1년으로 늘리자고 한다. “최저임금이 너무 가파르게 오른다”고 아우성이지만 지난해 4분기 5분위 배율(최상위 20%의 평균소득을 최하위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은 5.47배로 통계청 집계 이후 가장 악화됐다. 2014~2017년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의 평균연봉은 직원 평균연봉의 20배가 넘었다. 안전해야 할 일터는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기까지 한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백혈병 등으로 숨지고, 김용균 같은 노동자들이 기계에 끼여 숨지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한 해 1000명에 가까운 생명이 ‘일터에서의 사고’로 억울한 죽음을 맞고 있다.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서까지 원했던 노동조합 할 권리도 취약하다. 노조 조직률 10.7%에서 알 수 있듯, 산업현장 곳곳에서 “노조 할 권리를 달라”는 외침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8개 협약 중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강제노동 폐지 등 4개 협약에 여전히 비준하지 않았다. 

평화시장과 멀지 않은 청계천변에 오는 30일 ‘전태일 기념관’이 문을 연다. 그곳에 ‘태일피복’ 전시공간이 마련돼,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된다. 그곳에 가면, 그가 꿈꾸던 ‘근로기준법을 지키면서 차별 없는 대우와 공평한 분배가 이뤄지는 세상’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숨진 지 49년의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다섯번 바뀐 시간이다. 

그런데 모든 노동자는 그가 꿈꾸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김종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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