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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복장검사, 용의검사 같은 것을 담당하던 학생지도선생님은 절도를 중요시했다. 예를 들어 거수경례를 할 때 오른손이 곧게 펴지지 않고 구부러져 있거나 손바닥이 보인다 싶으면 불러다 혼쭐을 내곤 했다. 그럴 때 선생님 하는 말이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거 모르나?”였다. 그걸 선생님은 ‘박 대통령의 말씀’이라고 강조했다. 그 덕분에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은 내 머릿속에 박정희 대통령의 어록으로 각인돼 있다. 대학시절, 또는 군대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농담 삼아 이 말을 써먹은 기억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진짜 그런 교시를 내렸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얼마전 박정희기념도서관에 들어가 박정희 어록을 살펴보니 그런 말은 안 나와있다. 그런데 지난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이 똑같은 말을 해 깜짝 놀랐다.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북측이 격(格)에 안 맞는 하위직 인사를 지명했다는 이유로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며 회담을 무산시켜버린 것이다. 당시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박 대통령이 평소에 이 말을 종종 한다고 소개했다. 내 기억과 이 전 수석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박 대통령의 형식주의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건 박근혜 정부의 국정철학을 읽어내는 하나의 독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신문에 실린 두 사진이 내 눈을 잡아끈다. 박 대통령이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2기 내각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모습과 박 대통령이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는 장면이다. 임명장 수여 사진을 보면 대통령 앞에서 부총리와 장관들은 일렬횡대 부동자세로 서 있다. 한 명 한 명 호명이 되면 대통령 앞으로 나가 깍듯이 허리 굽혀 악수하고 임명장을 받은 뒤에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서 있으라는 행동지침을 받았을 것이다. 수여식이 진행되는 동안 부총리나 장관은 지도선생님 앞에 선 학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허리 곧추세우고 양팔을 바지 재봉선에 붙이고 눈동자도 함부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청와대 밖을 나가기만 하면 자동차 문도 자기 손으로 열 필요가 없는 귀한 몸이 되지만 이 순간에는 그런 영예가 누구 덕분에 가능한지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모든 장차관은 이 과정을 다 거치게 돼 있으니 대통령으로서는 내각을 장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절차다. 이때의 형식이 대통령과 내각의 관계라는 내용을 지배하는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신임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_ 연합뉴스
임명장 수여 형식이 박근혜 정부 고유의 것은 아니다. 이명박·노무현 전 대통령 때도 같은 방식으로 임명장을 수여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대통령과 장관의 이격거리는 지금이 가장 멀어보인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이런 구태의연한 의식이 왜 필요한지도 의문이지만, 이 정부 들어 유난히 먼 거리가 대통령의 권위적 형식주의를 상징하는 것 같아 보기에 불편하다.
대통령이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는 모습도 그렇다. 사진을 보면 대통령만 빼고 비서관들 앞에 노트북이 켜져 있다. 얼굴을 가릴 정도는 아니지만 마주 보고 대화하기에는 거추장스러워보인다. 얼마나 많고 얼마나 디테일한 논의를 하길래 비서관들조차 컴퓨터를 보면서 회의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노트북 회의도 이전 정부에서 보아온 형식이긴 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들어 하나가 더 보태졌다. 대통령의 교시를 종이에 열심히 받아 적는 일이다. 상대방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컴퓨터를 보거나 말씀 받아 적기 바쁜 자리에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이뤄지기는 어렵다.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뛰어가지 않고 전화와 서면으로만 보고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되지만 이런 회의장면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 것이다. 오죽하면 장관들이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받아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을까.
‘임명장 통치’와 ‘노트북 회의’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형식이다.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중동의 한 두 나라를 제외하곤 세계 어느 나라 정부도 노트북을 앞에 두고 회의를 하지는 않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비서관 또는 장관들과 회의하는 모습은 자유분방하기 이를 데 없다. 장관이 대통령 앞에서 삐딱하게 앉고 다리를 꼬기도 한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이론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이 변함없이 이 이론을 신봉한다면 스스로 형식을 바꾸면 된다. 딱딱하고 근엄한 형식에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형식으로. 그렇게 형식이 변화하면 지배하는 내용도 필경 달라질 게 아닌가.
이종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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