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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부정적 사건과 일화가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를 말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명박산성’이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6월 중순 경찰이 시위대의 청와대 행진을 막기 위해 광화문 한복판에 설치했던 컨테이너박스 바리케이드를 일컫는다. 시위대가 오르는 것을 막는다며 컨테이너 표면에 칠한 윤활유는 미끈미끈, 뺀질거리는 이명박 이미지와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용산 대통령실 청사 1층 로비에 가림막이 세워졌다는 소식에 명박산성을 떠올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청사 1층 현관에서 기자들과 진행하던 도어스테핑을 중단하면서 취한 조치였다. 가림막으로 인해 로비에서 출입구 쪽 시야가 차단됐고, 기자들은 윤 대통령이나 참모들의 출입을 파악할 수 없게 됐다. 거대한 흉물 명박산성과 가로 6m, 세로 4m의 대통령실 가림막을 물리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민심에 눈감고 귀막은 권력자의 불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명박산성과 대통령실 가림막은 다를 바 없다. 가림막은 ‘석열산성’의 징후다. 

가림막 하나로 침소봉대하는 게 아니다.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벽은 두 가지 경우에 생긴다. 대통령이 국민을 갈라치기 하거나, 숨길 것이 있을 때인데, 윤 대통령은 둘 다 해당된다. 실제 ‘모두의 대통령’을 포기한 윤 대통령이 30% 강경보수층을 겨냥하면서, 70%가 소외되고 있다. 중도층은 틀렸으니, 30%라도 결집시켜 국정 기반으로 삼겠다는 게 여권 전략이라는 말을 여러 곳에서 들었다. 아스팔트 보수를 겨냥한 듯한 대통령 메시지와 잇단 퇴행적 인사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석열산성은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여권의 이태원 참사 대처가 대표적이다. 정부 대응 실패로 국민 158명이 죽었는데도, 윤 대통령은 사과에 인색하다. 대통령은 참사 발생 1주일 후 공식회의에서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라 했고, 이는 ‘사실상의 대국민 사과’로 포장됐다.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대통령의 고교·대학 후배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진즉 파면됐어야 함에도 직을 유지하고 있다. 윤핵관은 국민의힘 의총에서 장관 하나 못 지키느냐고 화를 냈다. 대통령실 수석들은 정부 부실 대응을 질타하는 국회에서 ‘웃기고 있네’라며 킬킬댔다. 여권 전체가 희생자를 애도하고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70%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때처럼 밀리면 안 된다’는 30%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결과다. 이태원 참사를 기점으로, 석열산성의 규모는 명박산성을 넘어섰다. 

윤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의 지난 25일 금요일 관저 만찬도 석열산성의 증거다. 사진·동영상은 공개되지 않았고, 변변한 브리핑도 없다. 3시간20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숨기는 것인가. 만찬에 참석한 김종혁 비대위원은 방송에서 “넥타이 느슨하게 풀고, 두서없이 다양한 분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땅콩 놓고 맥주 마셨다”고 했다. 과연 맥주만 마셨을까. 어떤 술을 들이켰든 경제·안보위기 상황에서 여권 핵심들이 나눈 대화로는 한가하고, 한심하다. 윤 대통령은 여당 지도부 노고를 치하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보듬어야 할 대상은 여당이 아니라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이태원 참사로 집단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국민들이다. 

문재인 정부의 내로남불과 오만을 비판하더니, 그대로 따라한다. 야권 인사들을 집중 수사하면서, 김건희 여사 연루 의혹이 있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은 뭉개고, 재산 15억원을 축소신고한 김은혜 홍보수석은 봐줬다. 연이은 인사참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전 정권에서 이보다 훌륭한 사람 봤느냐고 큰소리친다. 그러다보니, 세간엔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돌아보게 될 줄 몰랐다’는 어처구니없는 농담이 나온다. 윤석열 정부 6개월을 겪으면서 실패한 전직 대통령들을 재평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니, ‘윤석열 매직’이라 할 만하다. 

석열산성 앞날은 명박산성보다 암울하다. 명박산성은 철거했지만, 석열산성은 더 두껍고 높으며 보이지 않아 없앨 수 없다. 겁 많았던 이명박은 국민이 저항하면 사과하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러나 평생 군림하는 검찰로 살았던 윤 대통령은 30%만 있다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 더 있다. 이명박은 촛불집회 때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이라도 불렀다. 뚝심의 윤 대통령은 물러설 기미가 없다. 그래도 속은 탈 것이다. 밤마다 다른 이슬만 찾고 있는 것 아닌가.

<이용욱 논설위원 woody@kyunghyang.com>

 

 

연재 | 경향의 눈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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