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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가 죽었다. 죽어서 염라대왕 앞으로 갔다. 알려진 바와 달리 염라대왕은 생사를 결정하는 힘은 없다. 죽은 자에게 지금 처한 상황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줄 뿐이다. 

“너는 밧줄도 통과하기 어렵다는 바늘귀를 지나서 천국에 이른 첫 번째 낙타이다. 네가 천국에 온 까닭은 아라비아반도의 유목민들이 주장하듯 신의 99번째 이름을 은밀히 알고 있어서가 아니다. 사막의 은수자들이 높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순종하도록 먼 사막으로 이끈 덕도 아니다. 황야를 헤매던 몽골의 부족장에게 네 피를 주어 목숨을 살린 공도 아니다.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며 몸에 그늘을 만드는 강인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네 어미가 새끼까지 노예로 살게 할 수 없어 일부러 젖을 주지 않은 탓도 아니다.” 

“어미가 젖을 주지 않다뇨? 무리 속에서 어미와 함께 물을 찾아 뜨거운 사막을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헬기가 날아와 총탄을 퍼부었다고요.”  

“응? 너는 호주에서 대량 살처분된 낙타구나. 마두금 연주를 듣고 눈물 흘리던 몽골 낙타의 새끼와 헷갈렸네. 생존경쟁의 악다구니를 피해 사막으로 간 네 조상의 이야기다. 그들은 불의 시간을 견디며 ‘영혼의 무량한 넓이를 감지하게’1) 되었지. 알다시피 영혼은 하나의 몸속에 갇혀 있지 않아. 에너지와 물질의 순환을 공유하는 생명체끼리 영혼을 공유하는 거야. 그러니 네가 천국에 온 이유도 사막을 걷다 보면 발바닥에 모래알이 박히듯 그저 우연임을 알려주마.”

“천국에 와서 크게 좋은 점은 없나 봐요?”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날지 선택할 수는 있어. 대부분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바라지만.”

“인간은 흉내쟁이 원숭이에 지나지 않아요. 하는 일은 시늉과 거짓말뿐. 그렇게 자주 눈물을 흘리지만, 기회만 있으면 자기 짐을 남에게 지게 하고, 생명까지 빼앗죠.”

“그럼 무엇으로 태어나길 바라지?”

“인간이 없고 물이 많은 곳에 가고 싶어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바닷속 깊은 곳이었다. 꿈속에서 흰수염고래는 낙타가 되어 사막 한가운데 서 있었다.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하늘에서 총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흰수염고래는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아 잠에서 깨어났다. 눈먼 물고기들이 별똥별처럼 곁을 스쳐 지나갔다. 고래는 한쪽 눈만 감고 잠이 들거나 너무 깊이 잠들지 않는다. 숨을 쉬고 참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의식이 없을 때는 숨을 쉬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한 저절로 숨이 쉬어지던 낙타나 인간과는 다르다. 고래는 늘 깨어 있어야 했다. 꼬리를 움직여 바다 위로 향한다. 바닷속에서는 아래로 내려가는 것보다 위로 올라가는 것이 더 쉬웠다. 지혜 없이는 미지의 어둠 속으로 함부로 내려갈 수 없다. 바닥의 진정한 깊이를 알게 되는 것은 죽음을 맞이한 뒤였다. 한 마리의 고래가 숨을 거두면, 거대한 몸이 품고 있던 많은 생명체와 물질들이 함께 하강한다. 가장 밑바닥에서 새로운 생명의 공동체가 일궈진다.     

위로 올라갈수록 프로펠러 소리가 요란해진다. 인간의 기계들이 내는 소음이다. 먼 곳에 있어도 고래는 들을 수 있다. 바다 위의 인간이 무엇을 알겠는가. 귀중한 물건이 사라지거나 동물이 총에 맞거나 사업이 예산을 초과하는 정도는 알겠지. 하지만 무한히 큰 것, 성스러운 것, 생명에 결부된 근본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한다. 그런 것은 인간의 조그만 뇌가 감당하지 못한다.2) 인간의 머릿속에는 ‘자연 속에 사다리가 하나 내재해 있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자연의 사다리. 박테리아에서 시작해 인간에까지 이르는 계층구조’.3) 인간은 열심히 제 머릿속의 사다리를 오른다.  흰수염고래가 바다 위로 솟구쳐 올라 깊은숨을 뿜어낸다. 행성의 바다를 회유하는 고래가 되기 전에는 알지 못하는 일들이 있다.

1), 2)‘시간과 물에 대하여’,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 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연재 | 부희령의 이야기의 발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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