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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인생+] 교학상장

opinionX 2022. 12. 1. 10:14

지난여름에 방영이 시작된 예능 프로그램 <최강 야구>를 가끔 본다. 프로팀에서 활약하다가 은퇴한 선수들로 구성된 ‘몬스터즈’ 팀이 고등학생, 대학생, 18세 이하 국가대표팀 등과 시합을 벌이고 있다. 후배들과의 부담 없는 친선 경기가 아닐까 싶지만, 매번 필승의 각오로 치열하게 대결한다. 7할 승률을 목표로 기획되었는데, 결코 만만한 승부가 아니다. 어린 선수들이 ‘대선배’들과 접전을 벌이는 장면은 여느 프로 경기 못지않게 박진감 넘친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후배들의 탁월한 플레이에 경탄하면서 한 수 배우는 태도다. 모든 스포츠 경기 자체가 자연스럽게 학습을 수반하지만, 나이와 경험에서 한참 아래인 팀에 패하면서 자기의 약점을 확인하는 모습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연령의 차이가 수직적 서열을 자동 생성하는 문화에서는 관계의 각도를 약간만 바꿔도 새로운 기운이 순환한다. 그러한 에너지의 변환은 어느 분야에서든 가능하다.

“나이 들면 바둑에 필수인 순발력과 집중력이 떨어진다. 나는 늙었고, 내가 하수다. 두 점씩이나 놓아야 하는 하수가 맞으니 후배를 떠나서 고수에게 배워야 하는 게 당연하다. 후배에게 배우는 게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한국 바둑계의 거목 서봉수가 얼마 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나는 하수다 … 후배든 중학생이든 누구에게도 배울 수 있다” 경향신문 10월11자). 갈수록 어렵고 모르는 것투성이라면서 끊임없이 정진하는 그의 노년은 공부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빨라지는 은퇴 후에 길어지는 여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고령 사회에서 많은 사람에게 곤혹스러운 과제로 여겨진다. 몬스터즈 팀의 활약과 서봉수 9단의 삶은 소중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현역 시절에 간직했던 열정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길은 새롭게 열릴 수 있다는 것, 까마득한 후학으로부터 기꺼이 배우겠다는 겸허함으로 사회적 입지를 넓혀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지금 몸담고 있는 세계에 오롯한 마음이 담겨 있는가일 것이다. 자신의 일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은 지속 가능한 성장의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도전하면서 교학상장이 이뤄질 수도 있다. 영화 <자산어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정약전과 창대의 만남을 보자. 정조가 서거한 직후에 벌어진 신유박해로 흑산도에 유배를 가게 된 정약전은 그곳에서 창대라는 젊은 어부와 친분을 맺는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 정약전은 창대에게 글을 가르치고, 평생 물고기를 잡으며 관련 지식을 방대하게 축적해온 창대로부터 바다 생물에 대해 배운다. 그 결과물로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어류 도감이 탄생하였다. 나이, 신분, 학력, 전문 영역이라는 높고 견고한 장벽을 넘어서면서 이뤄낸 성과다.

길어지는 수명은 점점 더 넓은 범위의 세대 사이에 다양한 네트워킹의 기회를 열어준다. 경계를 유연하게 가로지르면서 이뤄지는 배움과 협업은 의외의 부가 가치를 창출한다. 그 만남은 또한 각자의 인생에 반짝이는 선물이 될 것이다.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노인이 젊은이에게 귀 기울이는 세계는 축복받아야 한다.”(탈무드)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연재 | 인생+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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