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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백곡리 감나무

나무들이 붉거나 노랗게 물들었던 잎들을 내려놓는 조락의 계절이다. 겨울나기 채비를 마쳤다는 신호다. 이제 씨앗을 품은 열매를 튼실하게 키우는 데에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겨울잠에 들어야 한다.

낙엽을 마치면 나무의 열매가 눈에 들어올 차례다. 어미를 떠나 더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세계를 펼쳐나가기 위해 열매는 사람에게 혹은 초식동물의 눈에 들어야 한다. 잎 떨군 나뭇가지 위에 남은 빨간 까치밥이 눈에 띄는 것도 그래서다. 더불어 맛도 좋아야 한다. 맛이 제대로 들어야 사람이든 새든 짐승이든 찾아와 그의 씨앗을 옮겨줄 것이다.

거의 500년 동안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며 단맛을 키우며 살아온 감나무가 있다. 대개의 감나무가 200년 넘게 살기 힘든 사정을 감안하면 무척 오래된 나무다. 

경남 의령 정곡면 백곡리 마을 앞 논 가장자리에 우뚝 서 있는 이 감나무는 높이 28m에 가슴높이 줄기둘레도 5m 가까이 될 정도로 굵다. 우리나라에 살아 있는 감나무 가운데에서는 가장 큰 나무다.

2008년에 감나무 가운데에는 유일하게 천연기념물로 지정했지만, 이 감나무는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한다. 고작해야 나뭇가지 끝에 서너 알의 감을 맺는 데에 그친다. 이미 생식능력이 고갈된 것이다. 사람들에 의해 혹은 날짐승의 먹이가 되어 멀리 퍼져나간 씨앗들이 펼칠 내일을 기원하며 애면글면 살아남았을 뿐이다. 생식능력을 잃은 ‘의령 백곡리 감나무’가 갈수록 쇠약해지는 건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생명의 이치다.

마을 사람들은 이 감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고, 그러면서 차츰 나무의 건강이 더 악화됐다고 입을 모은다.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라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무가 사람이 다가서지 않으면서 나타난 결과라는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런 것처럼 나무도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임을 보여주는 또렷한 사례이지 싶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연재 |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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