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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과 부패만을 강조하는 역사인식은 총칼을 앞세우며 난폭한 침략 행동을 반복한 일본의 특징적인 침략방식에 눈을 감는다 
또한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난처한 처지에 빠졌던 조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고찰할 기회까지 차단한다
그러다보니 반면교사를 통해 한반도 현실을 타개할 상상력을 가로막는다. 식민사관은 국민을 무지하게 하여 무력에 빠뜨린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쓰다보면 애초 의도와 달리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전체적인 맥락과 이를 뒷받침하는 각론이 잘 어울리지 않을 때 특히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당사자는 이럴 때 흔히들 오해라고 답한다. 10월11일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국회부의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연관된 파동이 그랬다. 

정 위원장은 다시는 일본에 역사적 아픔을 당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발언했겠지만, 언급한 내용 가운데 큰 논란을 일으킬 만한 표현이 있었다. 그는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라고 질문을 던지고,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일본은 조선 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고 단정했다. 이 발언은 조선이 부패 때문에 스스로 망했지 일본의 침략 때문에 망하지 않았다는 주장 이외에 달리 들여다볼 문맥이 없다. 그는 이어 ‘조선 왕조는 무능하고 무지했다. 백성의 고혈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다가 망했다’며 망국의 원인에 무능과 무지를 추가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국운을 걸고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력으로 제압했고, 쓰러져가는 조선 왕조를 집어삼켰다’고 하여 일본의 국력과 능력에 압도된 조선이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다고 보았다.

일본의 무력(武力)과 국제 외교력을 긍정하고 조선의 부패, 무능, 무지, 무력(無力)에서 식민화의 원인을 찾는 역사인식은 과연 적절할까.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같은 시대인데 두 축을 분절하고 보는 관점이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일본의 침략에 눈을 감고 식민화의 결정적 이유로 조선의 한계를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전쟁 목적과 행위를 간과한 채 조선과 전쟁이 없었다고 단정하며 침략책임을 묻지 않는 태도 역시 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국사 교과서의 시대인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령 일본은 조선이 ‘잘 다스려지도록 크게 힘을 쏟고’ 있었지만 조선의 ‘내분’을 틈타 영향력을 넓히려는 러시아와 ‘청국에 언제나 방해’를 받았으므로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이것을 ‘진정’시켰다고 나온다(<초등국사 6학년용>, 1944). 또 ‘한국이 독립의 열매를 거둘 수 없어 항상 다른 나라의 압박을 받고, 동양의 평화를 깰 우려가’ 있어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아 ‘내정을 개선했다’고 서술되어 있다(<보통학교국사> 하, 1922). 

■  조선에서 시작된 두 차례의 침략전쟁

청일전쟁은 일본이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자 일으킨 전쟁이었다(시모노세키조약 제1조). 러일전쟁은 일본이 대한제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여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일으킨 전쟁이었다(포츠머스조약 제2조). 두 전쟁의 시작은 모두 조선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혁세력인 동학농민군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사회를 개혁하려는 민중의 움직임은 이후에 큰 좌절을 겪었다.  

두 차례의 침략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외국의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서구 열강은 한반도의 정치 군사적인 이해관계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동아시아 외교에서 조선은 주변의 주변에 위치한 국가이므로 청과 일본에 이은 다음 상대에 불과했다. 열강에 한반도는 안정된 이윤만 보장되면 그만인 곳이었다. 하지만 청, 러, 일에 대한제국은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상대이기도 해서 핵심 이해국가였다. 서구 열강은 세 국가 중 이기는 쪽에 섰으므로 고종의 중립화정책에 선뜻 동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 지 6일 만에 러시아가 주도하고 프랑스와 독일이 동참한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다시 청에 돌려주어야 했다. 국경선을 맞댄 두 나라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 편에 섰지 대한제국의 이권 때문이 아니었다. 한반도와 관계없는 이유가 우리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그런데도 치욕을 당한 일본 외교는 만한(滿韓)교환론처럼 러시아와도 집요하게 협상하며 한반도를 노렸다. 의화단운동 때는 군대를 파견해 민중 탄압에 동참했고, 중국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열강과 대등한 발언권을 확보했다. 일본 사회에서는 러시아를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로 ‘와신상담’이란 말이 유행했다. 

■ 일본의 의병전쟁 탄압과 대륙경영

일본은 러시아와의 갈등을 침략전쟁으로 해결하고 대한제국, 다롄과 뤼순을 확보했다. 자신의 ‘주권선’(국경선)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가 진출하기 이전에 먼저 한반도를 ‘이익선’(세력권)으로 확보한다는 적극 팽창전략을 실현할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일본은 대륙경영의 현장 지휘소 격으로 1906년 2월 한국통감부, 6월 펑톈총영사관, 8월 관동도독부, 11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각각 설치했다. 해양국가에서 대륙국가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열강은 이때부터 자신들이 그리는 세계 지도에서 한반도를 일본의 세력권으로 표시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에 영구 주둔할 병영을 건설하고 항상 1.5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유지하며 의병을 탄압했다. 의병에게 협조적인 사람이나 마을을 초토화전술이란 이름으로 잔인하게 보복했다. 애국계몽운동의 확산을 막고자 집회와 출판 등을 통제했다.  

1907년 7월 일본과 러시아는 지린성 창춘을 경계로 남만주와 대한제국, 북만주와 외몽골을 각자의 이권 지역으로 인정하는 제1차 러일협약을 체결했다. 여기에 영국과 프랑스까지 참가한 4개국 협조체제도 구축했다. 유럽에서 동북아로 이어지는 러시아 국경선 일대에서의 긴장관계를 당분간 해소한 것이다. 이로써 유럽에서 삼국협상축이 형성되었다면, 동북아에서 일본은 권익을 확대할 여지를 넓혀갔다. 

일본은 부산에서 만주까지 철로를 잇고자 7월21일에 만철의 철로를 협궤에서 표준궤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킨 데 이어 7월24일 행정 및 법률 분야의 자율권을 제약하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해산당한 군인들을 중심으로 의병전쟁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임시한국파견대를 긴급 편성해 탄압했다. 또 한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도쿄에 있던 간도파출소를 8월23일 룽징으로 이전해 북간도에 진출했다.

■ 호남의병 탄압 및 간도협약과 한국 병합

1909년 3월 일본 내각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병합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즉각적인 한국 병합에 주저하던 이토 통감의 동의까지 얻어낸 내각은 7월6일 한국 병합을 정식 의결하고, 곧장 천황의 허가를 받아 이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7월에 사법 및 감옥 사무에 관한 권한을 통감부에 귀속시키고, 군부를 폐지했다. 8월에 임시한국파견대가 호남의병만을 상대하는 ‘남한대토벌군사작전’을 특별히 기획했다. 이곳의 항일무장투쟁이 유독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시한국파견대는 9월1일부터 10월30일까지 특별한 군사작전을 벌여 최후의 조직적 의병세력을 와해시키고 한국 병합의 최대 걸림돌을 제거했다. 

일본은 거의 동시인 9월4일에 청과 간도협약을 체결해 국경 문제와 간도 영유권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일본 정부가 한국 병합 문제와 간도 문제에 청과 열강이 관여할 수 없게 간도 영유권과 간도 한인에 대한 재판권을 포기한 결과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부 애국계몽운동 참가자와 의병전쟁 관계자는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항일투쟁을 지속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도 그중 하나였다. 

1910년 데라우치 통감과 친일파는 한국 황제의 서명이 없는데도 ‘칙유’를 발표하고 한국 병합을 선언했다. 이때도 일본은 조선의 발전과 동양평화를 내세우며 침략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해외의 항일운동가들은 한국 병합을 부정했다. 그들은 1917년 ‘대동단결 선언’에서 자신들이 융희 황제의 주권을 계승한 ‘완전한 상속자’이며, 8월29일이 구(舊)한국 최후의 날이자 민권이 발생한 날로서 ‘신한국 최초의 날’이라 선언했다. 

이렇듯 항일운동가들은 일본의 지배를 인정한 적이 없다. 하지만 침략전쟁을 부정하는 식민사관은 이 진실에 주목할 수 없다. 무능과 부패만을 강조하는 역사인식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총칼을 앞세우며 난폭한 침략 행동을 반복한 일본의 특징적 침략 방식에 눈을 감는다.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난처한 처지에 빠졌던 조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고찰할 기회까지 차단한다. 그러다보니 반면교사(反面敎師)를 통해 오늘의 한반도가 처한 현실을 타개할 상상력을 가로막는다. 식민사관은 국민을 무지하게 하여 무력(無力)에 빠지게 만든다.



■신주백 

역사학자.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한국근현대사를 동아시아사에 접목하여 연구하며 현재를 고민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출발하여 최근에는 <한국역사학의 전환>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과 일본의 제국운영> 등을 간행했다. 저서 <역사화해와 동아시아형 미래만들기>, 이외에 공저로 <용산기지의 역사> <분단의 두 얼굴>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등이 있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연재 | 신주백의 사연史淵 - 경향신문

 

www.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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