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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운전 중에 생소한 경고등이 들어와서 당황한 일이 있다. 찾아보니 ‘D.P.F(Diesel Particulate Filter)’ 가동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다. 디젤 엔진에서는 입자상 물질이 많이 배출되기 때문에, 환경보호를 위해 D.P.F가 걸러낸 물질을 차량 내부에서 높은 온도의 열로 태워 처리함으로써 외부로 배출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이 장착되어 있다. 이 기능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일정 속도, 일정 시간 이상 달려 줘야 한다. 그런데 장거리 주행을 하지 않고 단거리 이동에만 반복적으로 차량을 이용하다 보니 배출 물질이 처리되지 못하고 쌓여버린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사실을 알고도 바쁜 일상 때문에 깜박거리는 경고등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몇 차례 짧은 거리를 오가는 운전을 하다가 문득, 이 경고등이 쳇바퀴 돌 듯 일상에 갇혀버린 삶을 향한 신호로 느껴졌다. 반복되는 일상이 만들어내는 이런저런 찌꺼기들이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채 쌓여만 가는데 그 위에 다시 또 일상을 얹어 가는 삶. 문제는 인식도 감각도 거기에 고정되어 간다는 점이다.

18세기 여행가로 유명한 정란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가 전국 각지를 두루 다 돌아보고 나서 이제 제주 한라산을 유람하겠다고 하니, 듣는 이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일상은 팽개친 채 여행만 다니더니 급기야 당시로선 위험천만한 제주도 뱃길에 오르겠다니 상식 밖의 일이긴 하다. 이용휴는 그를 전송하는 글에서 도리어 과거시험 준비나 각종 공무 서류에 빠져 사는 이들을 딱하게 여기며 말했다. “수백 년 후에 과연 지금 비웃는 자의 이름이 남을까, 비웃음을 당한 자의 이름이 남을까?”

일상을 벗어나 떠나는 여행이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은 새로운 인식과 감각이다. 인문학이나 종교에 효용이 있다면, 그 역시 고정된 인식과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데 있을 것이다. 주어진 하나의 시선만으로 일상의 이해관계와 선행관습에 갇혀 살기에는 삶이 너무 짧다. 몸을 위한 스트레칭의 기본은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안 쓰던 방식으로 쓰는 데에 있다. 그럴 때 몸이 새롭게 깨어나면서 조화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무엇에 갇혀 사는지 돌아보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인식, 다른 감각을 경험해 보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볼지 생각해 볼 일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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