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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면장을 하지.” 면장(面長) 노릇을 하는 데에도 식견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와전되어 사용되는 속담이다. “배우지 않으면 장(牆)을 대면하고 서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서경> 구절에서 유래한 ‘면장(面牆)’이 무지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여왔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뜻의 ‘면면장(免面牆)’이 ‘면장을 한다’는 표현으로 이어진 것이다. 장(牆)은 보통 담벼락으로 풀이되는데, 집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세워둔 가림막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깨달음을 위해 좌선하는 선사가 아니고서는, 앞이 꽉 막힌 곳에 서 있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면장을 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까닭은 자신의 눈앞에 가림막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배우지 못해서 가림막에 막혀 살면서도 그게 가림막인 줄 몰랐다면, 요즘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가림막에 온갖 정보가 난무해서 세상을 다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에 그 가림막 너머 혹은 바깥에 무언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소수의 일방적인 대중매체에서 정보를 얻던 때에 비해서 무궁하게 선택 가능한 쌍방향의 인터넷 공간을 활용하는 오늘, 오히려 우리 앞의 가림막이 더 견고해지는 면도 있다. 스스로 검색하고 선별했다고 믿는 정보들이 실은 누군가가 거르고 가공한, 혹은 은폐하고 왜곡한 정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과 해석이 혼재된 가운데, 의도적 해석을 거친 사실을 근거로 비타협적인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저마다 자기 앞의 가림막이 전부인 줄 아는 한, 건강한 토론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일관계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견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섣부른 판단에 앞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나의 가림막에 비친 정보들이 과연 누군가 덧씌워 놓은 프레임에서 자유로운지 살필 필요가 있다. 면장을 면하려면 먼저 내 눈앞에 가림막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가림막에 비판적 거리를 두고 조금만 더 품을 팔아서 해석 이전의 사실들에 눈길을 돌리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전문부터 2007년 한일수교회담 백서, 2012년과 2018년의 대법원 판결문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은 날것의 자료들을 우리 앞에 보여준다. 가림막을 주체적인 사고의 창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이야말로 이 시대에 면장을 면하는 길이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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