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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국을 끓여 놓고.” 약 100년 전인 1926년 2월, 세 차례에 걸친 동아일보의 설 기획 제목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새해 떡국을 끓여놓고도 온 가족이 모이지 못할 사정이 늘고 있었다. 땅 없는 농민과 빈민이 고향을 등지고 팔도의 도시로 흩어졌다. 일본, 만주, 중국, 러시아로, 더 멀게는 하와이, 캘리포니아, 유카탄반도, 쿠바 등지로도 흩어졌다. 극소수 조선인 부자의 여행이나 유학을 빼고는 다 살자고 발버둥치다가 생긴 이산이었다. 식민지 특유의 이산도 있었다. 일제에 맞선 이들의 옥살이가 낳은 이산이 그것이다.

옥살이 이산의 첫 예는 양근환(梁槿煥, 1894~1950)의 가족이다.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 임시정부의 맹장 조완구 가족의 사연이 그 뒤를 잇는다. 양근환은 1921년 일제 부역자 민원식을 도쿄에서 척살해 무기징역에 처해진 뒤 일본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민원식은 조선인 참정권 운동을 벌였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이른바 ‘문화정치’에 협력하고 자신의 정치적 야망까지 채우려는 고도의 부역이었다. 한마디로 일제의 통치에 정당성을 더하고, 민족운동전선을 분열시켰다. 더구나 민원식은 국민협회라는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립운동 일체를 폭도의 소요로 비난한 ‘시사신문’의 사주였다. 양근환 의사는 조직에다 정치적 확성기까지 쥐고 있었던 지능적인 부역자를 단칼에 해치운 셈이다.

“나는 학문도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론으로 일본인에게는 지지 않는다. (중략) 조국의 독립은 누구든지 희망하는 것이다. 헌병 제도가 변하여 순사 제도가 되고 무단정치가 문화정치가 되는 것은, 결국 별 차이 없는 것이다. (후략)”

양 의사는 거사 뒤에 나가사키에서 상하이로 가는 배에 올랐으나, 출항 두 시간을 앞두고 체포되어 도쿄로 압송된다. 인용한 일갈은 압송 경관에게 던진 한마디다(동아일보 1921년 3월4일자). 이후 감형되어 1933년 출소하기 전까지 양 의사 일가의 설은 이산가족의 설이었다. 그때까지 노모는 바다 너머 감옥에 있는 아들과 면회 한 번 하지 못한 채 오로지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받는 형편이었다.

“그(양 의사의 딸)는 오히려 이번 설을 당하여 별다른 음식(떡국)을 대하고는 ‘할머니 동경 있는 아버지도 이런 음식을 먹소. 그런데 아버지는 언제나 나오오’ 하며 울먹거리었다고 한다.” 

양 의사의 노모는 당시 서울 적선동 75번지 단칸방에서 유치원생 손녀, 양 의사의 딸을 거두고 있었다. 일본에 아빠 보러 가자고 조르던 양 의사의 딸은 떡국 앞에서 울음이 터졌다. 한국 음식 문화사 최근 100년 안에는 지극히 식민지다운 눈물이 떨어진 떡국도 한 그릇 있다.

<고영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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