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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선배 교수님이 계시다. 어디에 발표하거나 게재하는 건 아니고 나를 포함해 가까운 직장 동료를 비롯한 지인에게만 회람하게 하시는 듯했다.

선생님의 작품들은 학생을 인솔하여 해외교육봉사 가서 겪은 에피소드 등 주로 학교 일과 관련한 내용이었는데, 각운이 딱딱 들어맞고 수미상관의 형식미가 철저했다. 공대 모범생이 교양국어 수업에서 작성한 과제물 느낌이랄까. 혹은 ‘오늘 날씨, 맑음’으로 시작하여 ‘참 재미있었다’로 맺는, 소년이 연필로 반듯하게 적어내린 방학일기 같다고 할까. 읽는 내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렇지만 나보다 한참 손위인 분께 “시가 귀엽습니다”라고 평할 용기는 나지 않아,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정도로 예의 바르게 호응하곤 했다.

지난 늦겨울이었다. 카톡 알림음과 함께 또 긴 시구가 보여 휴대폰을 집어 들었더니 뜻밖에도 위독한 아버지 병문안을 다녀온 내용이었다. 학교 일이 아닌 소재는 처음인 데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손쉽게 위로를 건네기가 조심스러웠다. 답을 쓰고 지우길 반복하다 이내 잊었는데, 여러 날 지나 교원 동정란에 그분 부친상 부고가 올라왔다. 시를 다시 찾아 읽으며 마음이 아릿했다. 빈소가 먼 곳이었으나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당시 봄방학 시기라 항공편이 전석 매진이었다. 그냥 학과사무실로 부의금을 전달해야 하나 하던 찰나, 김포행 취소석이 한 자리 뜨기에 얼른 구매했다. 돌아오는 항공권은 공항에서 대기하며 구하기로 하고 무작정 상경했다. 막상 빈소에 도착하니 ‘타학과 후배교수가 혼자 여기까지 온 게 조문 관례에 어긋나는 과잉 아닐까’ 뒤늦게 걱정이 되었다. 우물쭈물 방명록에 이름을 적다 영정 곁에 형제들과 나란히 서 계신 선생님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알아본 그분의 눈이 둥그레지더니 바로 다음 순간 초승달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활짝, 그야말로 활짝 웃으셨다.

나는 당황했다. 비록 상례에 무지했어도 빈소에서 웃는 건 예의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눈길을 피하며 애써 침통한 표정을 유지했다. 헌화하고 묵념한 후 상주와 인사하려고 고개를 드니 여전히 초승달 눈매로 싱긋싱긋 웃고 계셨다. 안 그래도 항공권이 구해지질 않아 제주 지인들은 거의 못 왔다 하셨다. “교수님도 안 오셔도 되는데…. 근데 와주니까 좋네요. 좋아요, 정말.”

순간 따뜻한 무언가 내면에서 뭉클 솟았다. 어떤 단어로도 오롯이 표현 안될 감정. 그리고 예감했다. 생을 통해 알아온 좋은 사람들을 저마다 사진 한 장으로 만들어 기억하라 한다면 그 선생님은 내게 상복 입은 채 이쪽을 보며 해사하게 웃는 지금 모습으로 간직될 것임을.

“저한테 교수님은 이 모습으로 기억될 거 같아요.” 생각해보니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졸업을 앞둔 학생과 상담하는 중에. 그 친구가 말하기를, 상담 올 때 내가 항상 차를 끓여 주었단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저편에서 전기포트 버튼을 탁 누르고서 차 상자를 들어 올리며 “레몬차 마실래, 도라지차 마실래?” 물었다고. 그 장면이 잊히지 않을 거라 했다. 한편 한 동료는 방문할 때마다 서랍에서 꺼내놓던 양과자들로 나를 기억할 거라 하셨다. 외할머니 장롱이나 이불 속처럼, 나누어 먹을 다디단 군것질 거리를 쟁여둔 이소영 선생의 책상서랍.

찻물 끓이고 서랍에서 과자 꺼낼 때 표정을 나는 모른다. 유체 이탈하여 스스로를 본 일이 없으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이들이 품었던 느낌이 내가 조문 가서 선배 교수님을 보며 가진 감정과 닮아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그 생각을 하면 행복해진다. 올해엔 우리가 세상 안에서 서로 관계 맺으며 ‘지금 이 모습으로 저 사람을 일생 동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많이 만났으면 한다. 그런 사소한 게 무슨 소망이냐 할 테지만, 그게 나의 새해 소망이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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