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역사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1848년과 1968년을 세계혁명의 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인류역사를 통해 오로지 그 두 해만이 세계혁명의 해라고 못 박았지요. 그가 이렇게 썼을 때, 나는 이 저명한 역사학자에게서 투명한 지성 대신에 지적 나태와 과장된 상상력, 깜찍한 스토리텔링 재능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만일 실패한 혁명, 유산한 혁명, 혁명의 시도 따위를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해들을 혁명의 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기실 월러스틴도 그 두 ‘세계혁명’이 다 실패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둘 다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고 강변했지요.

그러나 언어를 엄밀하게 쓰기로 작정한 뒤, 월러스틴의 그 발언을 따져봅시다. 1848년의 실패한 혁명들은 모두 유럽에서 시도되었습니다. 미국인 월러스틴은 유럽을 세계와 등치하는 유럽중심주의자에 불과합니다. 유럽을 세계와 등치할 수 없는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1848년을 세계혁명의 해라고 부르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월러스틴이 1848년에 칠해놓은 붉은 빛깔은 오로지 유럽에 한정된 것입니다.

게다가 혁명의 시도를 혁명이라 부르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우선 1848년을 봅시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 지역의 3월혁명은 봉건세력과 결탁한 부르주아지의 손에 진압됐습니다. 10년 넘어 계속된 영국의 차티스트운동은 1848년에도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니가 로마 공화국을 건설했지만, 이탈리아가 통일된 것은 그보다 10년도 더 지나서였습니다.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 덴마크에서의 혁명운동도 구체제에 의해 진압됐습니다. 오로지 프랑스의 2월혁명만이 1830년 7월 왕정체제를 끝장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프티트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힘을 합쳐 공화정을 회복한 겁니다.

1968년 역시 세계혁명의 해라 부를 수 없습니다. 1968년에는 유럽 바깥에서도 혁명이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968년 유럽과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 목격한 것은 가장 후하게 평가해도 유산한 혁명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이 유럽 바깥으로 퍼져나간 것도 베트남 전쟁 덕분입니다. 월러스틴이 세계혁명이라고 부르는 1968년 사태는 크게 보아 반전 평화운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그럴싸한 혁명의 구호가 휘날린 것뿐이었지요. 마르크스, 마오쩌둥, 마르쿠제 이 3M의 깃발을 내걸며 ‘위대한 거부’를 외치던 서독 학생들은 자본주의체제에 작게도 틈을 내지 못했습니다.

1848년과 마찬가지로 1968년에도 가장 화려한 스펙터클을 보여준 것은 프랑스였습니다. 당신이 다니던 파리 서부 낭테르대학(파리10대학)에서 시작된 이 반정부 시위는 프랑스 전역으로 번지며 자본주의와 물신주의를 넘는 새로운 세상을 외쳤고, 역사에 남을 멋들어진 선동구호를 생산해 냈습니다.

예컨대 “금지를 금지하라” “파괴는 창조의 열정이다”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굶주림은 참아도 권태로움은 못 참는다” “선거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따위의 구호입니다. 그런데 그 구호들이 어떻게 세계를 흔들어놓았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당신보다 10년 이상 아래인 내 세대의 어떤 이들에게조차 68년 5월 프랑스는 신비의 베일을 쓰고 다가옵니다. 금지를 금지하라는 구호로 드골 정권에 반기를 든 그 ‘혁명’은 당신이 이끈 낭테르 대학 학생들이 시작했지만 이내 노동자들에게 번졌고, 처음에는 이 ‘혁명’에 반대했던 프랑스 공산당마저 거기 가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1968년 5월이 프랑스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상상’합니다. 그 ‘혁명’이 드골을 하야시키지 못했지만, 프랑스와 서유럽의 습속의 변화, 집단적 아비튀스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68세대라는 명칭은 그 ‘혁명’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이든 단순히 참여적 관찰을 했던 사람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훈장입니다.

그러나 1968년 5월이 기성체제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1990년대 중반에 공개된 미국 CIA 문서에 따르면 프랑스에 산재해 있던 미국 스파이들은 5월폭동이 프랑스 자본주의를 결코 흔들 수 없으리라고 올바르게 관찰했습니다. 그들은 1968년 5월을 그저 ‘작은 소란’으로 보았습니다. 그 소란 속의 온갖 혁명적 구호들이 결코 프랑스 자본주의 체제에 상처를 낼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외려 그들은 유럽 반미주의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드골이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을 고소하게 여겼을 따름이지요.

그 소란이 가라앉은 이듬해 4월, 드골이 지방행정개혁과 상원 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자신의 신임과 결부시키고 국민투표에서 져 하야한 것을 두고, 5월 혁명이 성공했다고 해석하는 역사학자들도 있습니다. 나는 거기에 선뜻 동의할 수 없습니다. 프랑스 유권자들은 어떤 기술적 쟁점에 반대한 것이지, 드골에게 반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프랑스 좌파에게 1968년 5월은 1871년 파리코뮌 이래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5월을 상징하는 사람이 당신입니다. 그 폭동의 전 과정에 당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신의 이름이 허명일 가능성의 문을 엽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를 떠올리듯,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을 떠올리듯, 우리는 68년 5월 프랑스에서 대뜸 다니엘 콘-벤디트라는 이름을 떠올립니다. 낭테르대학에서 당신이 선동적 연설을 하지 않았다면, 68년 5월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시위가 라탱구역의 소르본대학으로, 노동계로, 공산당으로 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정부 측에서 흘리자, 시위자들은 “우리는 모두 독일계 유대인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5월22일 당신이 ‘선동적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독일로 추방된 뒤에도 5월은 계속됐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68년 5월의 엔진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당신을 68년 5월의 상징적 인물로 기억합니다. ‘붉은 다니(Dany le Rouge)’라는 당신의 별명은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물세 살 먹은 ‘붉은 다니’의 붉음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68년 5월에 나부끼던 그 숱한 구호 중에서 당신이 체현하고 있던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당신의 ‘붉음’은 프리섹스, 기숙사에서의 남녀동거, 더 나아가 아동성애에 대한 관용 정도였습니다. 월러스틴이 세계혁명의 해라고 불렀던 1968년이 결코 세계혁명의 해가 아니었듯, 군중들이 ‘붉은 다니’라고 불렀던 당신은 사실 붉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신이 프랑스와 독일 이중국적자였는데도, 프랑스 정부는 1990년대까지 당신의 프랑스 입국을 막았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상징성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탄창이 빈 적의 총에 겁먹은 병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이미 위험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붉은 다니’였을 때조차 위험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이의 거의 모든 이념들에 발을 걸치며 동요를 거듭했고, 그래서 친구들과 적들을 수시로 바꾸었습니다. 1984년 당신은 독일 녹색당에 가입하면서 ‘녹색 다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붉은 다니’가 붉지 않았듯, ‘녹색 다니’도 푸르러 보이진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 당신이 노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중국적자인 점을 충분히 이용해 당신은 독일 녹색당과 프랑스 녹색당을 오가며 유럽의회 의원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2004년 당신이 로마에서 유럽 녹색당 창당을 주도했을 때, 당신은 유럽 녹색정치의 확고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녹색정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당신의 언어는 늘 좌우로 과격하지만, 당신의 실천은 출판사나 서점을 운영하는 것, 유럽의회를 드나드는 것, 반권위주의적 유치원을 운영하는 것뿐입니다. 그 반권위주의적 유치원이라는 것도 당신이 삼켰다 뱉었다 하는 아동성애에 대한 관용 때문에 어쩐지 께름칙합니다.

당신의 녹색정치가 생태정치에서 여성정치로, LGBT정치로, 기본소득 정치로 확장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당신의 녹색정치가 무지개 정치로 확장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당신이 시장자본주의를 예찬하지 않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개입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의 발언들에서 어떤 일관성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아마 ‘적록색맹’의 팸플릿 저자로 삶을 마칠 것입니다. 당신이 1988년에 프랑스어로 쓴 <우리는 혁명을 너무 간절히 사랑했다>는 68년 5월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차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사랑한 혁명이란, 성적 분방함 말고는, 도대체 무엇이었던가요? 적록혁명은 적어도 그 이상의 것입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