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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당신의 서른여섯 번째 기일입니다. 당신이 불귀의 객이 된 것을 알게 된 어느 가을 이른 아침에 제가 슬펐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실은 기쁘고 후련했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의 죽음을 슬퍼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부당하게 죽이고 가두고 다치게 한 많은 이들에게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 안에는 한 움큼의 불안이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불안은 북한이 남침한다거나 하는 그런 허황한 상상이 낳은 불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군이 대한민국 땅에 버티고 있는데, 북한이 이성을 잃지 않는 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지요.

다만, 당신이 시민불복종에 무릎 꿇고 권좌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궁정쿠데타 시도에 의해 귀천(歸天)한 것이 꺼림칙했습니다. 물론 그 어설픈 시도의 주도자는 즉각 체포돼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만, 저는 당신의 부하 군인들에 대한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시민혁명이 당신을 끌어내렸다면, 당신을 따르던 육군 소장들의 정치적 야심이 활활 타오를 기회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길게 보자면 당신의 죽음은 그해 여름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과 가을의 김영삼 신민당 총재 국회의원직 제명, 그리고 그에 따른 부마항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유신체제를 극적으로 직접 끝장낸 것은 당신 심복의 총알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불안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제 불안은 가장 나쁜 형태로 실현돼, 군사독재정권은 8년간 더 연장되었습니다.

당신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어떻든, 당신은 헌정을 파괴해 집권한 군인독재자였습니다.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동안 당신은 정치적 반대파들을 북한과 연계해 간첩으로 몰아 죽이거나 가두거나 다치게 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귀환한 납북어부들을 포함해 아무런 정치활동을 하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간첩 누명을 씌워 정치적 이득을 취한 것입니다. 한 시인의 표현대로, 당신의 집권기 대한민국은 ‘겨울공화국’이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그 전문(前文)에서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반역자라는 뜻입니다. 당신 따님의 뜻에 따라 곧 만들어진다는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 당신이 어떻게 묘사되든, 저 빛나는 6월 시민혁명이 분만한 제6공화국 헌법 아래서 당신은 한낱 대한민국의 반역자일 뿐입니다. 당신에게는 그 반역을 역사의 노둣돌로 삼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5·16 군사반란을 반겼던 지식인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민주당 정권의 무능에 넌더리가 났던 참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탐욕이 그 가능성을 없애버렸습니다.

당신이 거느렸던 두 공화국 가운데 앞의 공화국, 다시 말해 제3공화국도 군사독재체제이기는 했습니다. 정치공작과 고문과 불법체포가 일상적인 사회였습니다. 당신은 소위 4대 의혹사건이라 불리는 부정부패를 통해 민주공화당을 만들었고, 그 정당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한때 남로당원이었던 터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주공화당의 창당 방식은 공산주의자들의 점 조직 행태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당신은 반란 이후 많은 반란동지들을 숙청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교수대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1969년 3선개헌과 1972년 유신쿠데타로 영구집권의 길을 열지만 않았더라면, 지금 역사는 당신을 사뭇 덜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을 것입니다. 유신이라는 이름의 친위쿠데타로 당신이 급조한 제4공화국은, 당신이 작고한 뒤 남도(南道)를 적신 핏물 속에서 솟아난 제5공화국과 함께, 한국 현대정치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반란 이후에 수많은 식언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스스로 만든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중임만 하고 물러났다면, 1971년 선거에서 당신의 민주공화당이 집권을 했든, 그 시기의 제1야당 신민당이 집권을 했든,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서서히 회생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에 악마의 주술을 걸고 있는 지역주의(사실은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이 이룩한 압축성장이 당신의 지도력 덕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얄궂게도, 이들은 시장에 정부가 간섭하는 데 경기를 일으키는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당신의 계획경제에 극도의 증오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있습니다. 당신 덕분이든 그 시대 한국인들의 고단한 노동 덕분이든, 당신이 집권한 동안 한국 경제의 규모는 크게 불어났습니다. 당신보다 더 심한 독재를 하고도 제 나라 경제를 망쳐놓은 사람들을 저는 압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 견줘 당신은 덜 비판받아야 하는 걸까요? 당신이 4년 임기 두 번만 채우고 물러났다면, 한국 경제는 이내 활기를 잃었을까요?

1971년 대선에서 당신은 대통령을 단 한 번만 더 하겠다며 다시는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식언의 대명사인 당신도 그 약속만은 지켰습니다. 다만 아주 괴상한 방식으로, 즉 대통령 직선제를 아예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지켰지요. 당신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섬겼고,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의 황제 푸이를 섬겼고, 해방 뒤에는 남로당에 가입해 잠시 박헌영(과 김일성)을 섬겼고, 동지들을 팔아 전향하고 나서는 이승만을 섬겼습니다. 장면을 섬겼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군사반란 계획이 4월혁명 이전에 세워졌다는 것은 이제 다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이런저런 권력자들을 섬기며 출세의 길을 달리다가, 당신은 마침내 군사반란을 통해 최고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청렴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반란 직후에 터진 부정부패 사건들은 그만두고라도, 당신이 청렴했다면 지금 당신의 자녀들이 지니고 있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청렴한 대통령이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당신이 굳이 부패할 필요가 있었는지요? 대한민국의 실질적 주권자가 국민이 아니라 당신이었는데, 비록 북한보다는 정도가 덜했지만 당신 치하의 대한민국은 일종의 가산국가였는데, 당신이 부패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당신의 사유물이었으니까요.

놀랍게도, 당신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 다음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다음의 셋 가운데 하나거나 둘이거나 셋 모두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실제로 당신이 존경받을 만한 권력자였을 가능성입니다. 저는 여기엔 무게를 두고 싶지 않습니다. 둘째는 당신이 장기집권하는 동안 박정희족(族)을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박아놓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은덕을 입은 그들의 자식들은 이제 군복 대신에 우아한 연미복을 입고, 군부대가 아니라 파티장이나 학술회장이나 언론사에서 당신의 치적을 선전하느라 바쁩니다. 셋째는 당신의 죽음이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을 고꾸라뜨린 이에 대한 원망이 큽니다.

당신이 시민혁명에 밀려 권좌에서 내려왔다면, 평범한 삶을 살다가 고종명했다면, 박정희 신드롬이 이리 거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신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상과 포개집니다. 그이의 죽음은 당신의 죽음보다 더 비극적이었고, 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정치적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한동안 하나로 묶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죽음의 방식이 그의 삶에 대한 평가를 이런 식으로 오염시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아직 이성이 모자라다는 뜻입니다. 당신과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에는 그런 식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대통령이 나오지 않기 바랍니다.

당신이 작고한 이튿날, 대학생이었던 저는 당신의 따님이 뒷날 대통령이 되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기기묘묘한 파동방정식을 통해 그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보지 못했지만, 당신에게는 친손자가 넷이나 있습니다. 당신의 따님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이 마당에, 당신의 손자가 미래의 어느 때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도 이젠 말 못하겠습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의 견고함은 결국 당신에 대한 지지의 견고함이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신과 같은 독재자가 아니듯, 당신의 손자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독재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 걸출한 정치인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나이 탓에 제가 그 가능성이 현실화하는 것을 절대 볼 수 없다는 사실만이 제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의 기일에 당신을 추도할 수 없는 현실이 제게도 편치만은 않습니다. 그 세상에서는 안빈낙도하시기를 빕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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