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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골든벨 사회

opinionX 2019. 3. 22. 14:42

공영방송 KBS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방영하고 있는 <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생존주의 시대답게 청소년 100명이 50문제를 풀면서 매 순간 살아남아야 하는 서바이벌 포맷이다. 50문제를 모두 맞힌 사람은 골든벨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새길 수 있다. 하다보면 중간에 학생들이 대거 탈락하는데, 패자부활이란 이름의 매우 간단한 게임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50번 문제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채 탈락한다. 가끔 최후까지 살아남은 한 명이 50번 문제에 도전할 때도 있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대부분 생존경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구나.’ ‘최후의 승자는 결국 한 명이구나.’ 일상의 삶이 서바이벌 게임처럼 변한 지금 사회 전 성원이 모두 이런 생각에 빠져들면 사회가 지속될 수 없다. 좌절과 냉소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달래어 다시 생존경쟁에 복귀시켜야 한다. 패자부활 게임이 필요한 이유다. 힐링을 시켜 다시 희망을 갖게 만들어 생존경쟁에 복귀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메시지도 문제지만, 문제의 수준도 그에 못지않다. 2016년 나온 문제다. “다음 중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아닌 사람은? 1) 톨스토이 2) 타고르 3) 앙드레 지드 4) 펄 벅 5) 헤르만 헤세.” “멘델스존 <결혼 행진곡>은 요정들과 청춘남녀의 아름답고 몽환적인 사랑을 그린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입니다. 어떤 작품일까요?” 도대체 이따위 문제를 풀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읽지도 않은 책, 감상하지도 않은 음악 ‘제목’을 알아맞힌다고 박수치고 환호하고 장학금 주고 명예의전당에 이름 올리는 우스꽝스러운 사회.

골든벨 명예의전당에 오른 어느 최후 생존자의 고백이다. “방송 퀴즈라는 게 문제를 처음 들었을 때 바로 생각나지 않으면 절대 맞힐 수가 없거든요. 여유 시간을 5초 더 준다고 하여 생각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50문제 모두 제가 순간적으로 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왔으니 정말 행운이었던 거죠.” 자극-반응 연쇄처럼 깊은 사유 없이 단 몇 초 만에 계속 답을 해야 하는 문제를 잘 맞혀야 한다. 그러면 우리 사회에서 승승장구한다. 이 골든벨 최후 승자는 대학 들어간 지 몇 년 채 되지도 않아 사법시험에 붙었다. 도대체 시험문제가 어떻기에?

1996년 38회 사법시험에 나온 역사 문제다. “다음 중 고려후기에 閔漬가 편찬한 史書는? 1) 古今錄 2) 千秋金鏡錄 3) 本朝編年綱目 4) 史略 5) 編年通錄.” 응시자가 읽어보지도 않았을 역사서 이름 알아맞히기 퀴즈다. 대부분 이름만 전하는 역사서라 접할 수조차 없다. 엘리트가 치르는 사법시험이니 한자(漢字) 읽기 능력 검증이라도 하려는 걸까? 어쨌든 골든벨 퀴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문제를 잘 푼 사람들은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었다. 그 후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법조계, 정계, 재계, 언론계의 특권층이 되어 온 나라를 쥐락펴락해왔다.

그나마 이제 사법시험 제도가 폐지되었으니 사정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시험문제를 보면 대부분 정보의 옳고 그름을 묻는 순간 기억 능력 테스트다. 기껏해야 암기한 단순 지식을 바탕으로 순차적으로 추론하는 논리 문제다. 인지능력 테스트인 셈이다. 물론 복잡한 현대사회에는 참과 거짓을 순식간에 인지적으로 식별해내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이 과도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까? 자극-반응에 몰두하다보면 자아가 축소되기 마련이다. 보다 일반화된 타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대상화해서 타자들과 정서적·도덕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감퇴된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현재 ‘온 나라 공무원 되기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바로 알 수 있는 퀴즈풀이 결과로 한 줄 세워서 극소수의 승자에게는 삐뚤어진 엘리트 의식과 특권을, 나머지 대다수 패자에게는 지나친 열패감과 차별을 평생 각인시키는 ‘골든벨 사회’. 2018년 9급 공무원 한국사 문제다. 자, 다 같이 한번 풀어보도록 하자. “다음 해외 견문 기록을 시기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ㄱ. 표해록 ㄴ. 열하일기 ㄷ. 서유견문 ㄹ. 해동제국기”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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