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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20년 만에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운동을 하기 위해서인데, 초중급반의 정원이 이미 차 있고, 20년 전에 영법을 거의 다 배웠다는 이유로 나는 중상급반에 배정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게는 너무 무리다. 영법이 서투른 것은 물론이고 도저히 다른 회원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대열의 맨 뒤에 서도 한 바퀴 돌고 나면 먼저 한 바퀴 돌고 온 앞 사람과 다시 부딪친다. 체력이 달려서 멈추고, 대열의 흐름을 방해할까봐 또 멈춰서 비키고, 이렇게 눈치만 보다가는 끝내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아 이를 악물고 해보는데, 그래봤자 이내 누군가와 부딪친다.

영법이고 자세고 일단 빨리만 가보자 애는 쓰는데, 몸이라는 게 마음 따라 움직여지는 건 아니지 않나. 물속에서 악을 쓰다 보면 가끔 의아해진다. 올림픽에 나가려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는 이렇게 악착같이 속도를 내어서 수영을 하는 걸까. 그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방해가 되지 않으려 기를 쓰는 동안 내가 취해야 할 바른 자세를 무너뜨리느라 입으로 코로 들어오는 물을 삼키고 감내하면서 나는 종종 서럽다. 평균의 속도를 맞추지 못하는 건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제일 서러운 건 그래도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다. 처음 수영을 배울 때, 하면 된다고, 파이팅을 외쳐주던 회원들은 더 이상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하고 또 하면 못할 일 없다는 믿음이 팽배한 사회에서 끝내 못하는 사람은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만다. 나는 노력하지만, 결과가 없는 노력은 인정받지 못한다.

학교 다닐 때 뼈저리게 느꼈던 사실을 삶의 기운을 북돋우자고 시작한 수영에서 다시 느끼는 기분도 씁쓸하다. 화가 나서 일어나면 건너편 레인에서 선생님에게 혼나지 않으려고, 지적 받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물살을 가르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는 그래도 즐겁다니 혼나도 돼, 지적 받아도 돼, 너무 힘들면 멈춰도 돼, 수영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에게 건네는 말은 사실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단 하루 수영을 즐겁게 했던 날이 있다. 달의 마지막 날 주어지는 자유수영 시간이었는데, 회원 수도 많지 않았고 정해진 규칙도 순서도 없었다. 자기 속도대로 자기가 하는 만큼만 해도 되는 날이었는데, 긴 레인을 멈추지 않고 두 번쯤 돌고 일어났을 때, 평소에 내 부진을 보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던 이가 말했다. “정말 느린데, 정말 잘하시네요.” 물론이다. 맞춰야 할 평균의 속도가 없는 곳에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고 여유롭게 물살을 갈랐다. 하마터면 얼굴만 겨우 아는 상대방을 붙잡고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만의 속도가 있고, 그 속도에 맞춰 살 수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인생지론을 늘어놓을 뻔했다.

내가 수영에 적잖게 스트레스를 받으니 누군가 영화 <4등>을 추천해주었다. 수영을 좋아하고 재능도 있는데, 대회에만 나가면 늘 4등밖에 못하는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라고 했다. 위로 받고자 보았는데, 막상 내용은 조금 달랐다. 수영에 대한 재능이 있고, 타고난 재주가 있고 재주만큼 성취도 했으나 성취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무력해진 한때의 수영챔피언과 재능이 있고 좋아하지만 늘 4등밖에 못하는 아이가 만나서 겪게 되는 일종의 성장 이야기이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원해서 할 때 모든 경쟁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 영화의 교훈이라면 교훈일 터인데, 영화의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화의 주인공이 결국 1등을 하고 만 것이다.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끝내 1등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고 또 한다고 해서, 언젠가는, 결국, 모든 것을 성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과정 아닌가. 1등 안 해도 돼! 나는 화면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내 바로 옆 레인에서 물살을 가르고 있는 내 아이에게도 해 줄 수 있을까.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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