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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감]괴물이 된 두 영웅

opinionX 2019. 9. 25. 10:34

“나는 한 놈만 패”라는 대사가 어느 영화에서 처음 나왔더라. <주유소 습격사건>이던가. 요즘 돌아가는 정국이 딱 그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상황은 다르다. 영화에서는 약자가 강자에 맞서기 위한 부득이한 생존방법(?!)이었지만 현실에서 그 대사를 하는 사람이 약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생존방법이라는 점에서는 어떤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한 놈만 패던 일이 오직 이번뿐이었을까. 한 놈만 패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정반대의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문제를 해결할 오직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그런 기대 말이다. 오직 한 놈을 제거해서 상황을 해결하고 싶은 정반대편에 오직 한 사람을 세워 세상을 구원하려는 욕구도 존재한다. “오직 한 놈만 패”서 정의를 구현하고 싶은 이면에 “오직 한 사람에 의해” 정의를 실천하고 싶은 욕망도 서 있는 것이다. 

생각난 김에 해당 대사가 등장하는 영화를 찾아보려다 지난해 개봉했던 애니메이션이 눈에 띄었다. <인크레더블>이다. <인크레더블>은 슈퍼히어로가 불법이 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슈퍼히어로 가족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1편을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사회 도처에 난무하는 위험한 상황을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을 통제하여 보험 서류나 꾸미고 전화를 받는 평범한 삶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런 통제는 아무래도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전적으로 약자들을 돕고자 하는 주인공 히어로들의 선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그 선함으로 느닷없이 나타난 악의 세력을 제거했고, 그리하여 슈퍼히어로가 존재해야 하는 당위와 부활의 필요를 주장하듯 끝난 것이 1편이었다. 

그러하니 속편으로 제작된 2편에서는 그들의 맹활약을 본격적으로 다룰 것 같았는데, 의외로 영화는 그들이 정말 사회에 필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묻고 있었다. 히어로를 의지하고 믿었으나 결국 악당에 의해 맞이한 부모의 죽음을 두고, 부모가 죽은 건 히어로가 불법적인 존재가 되어서 부모를 도울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 아들과 히어로가 자신을 도와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스스로를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 부모의 나약함이 죽음을 가져온 거라는 딸의 대립이 영화의 바탕에 놓여 있는데, 나는 이 질문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대체로 후자의 입장에 동의했다. 슈퍼히어로가 있어 세상이 그에게 자신의 모든 안위를 구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기대에는 내 안위를 구해줄 강력한 대체자는 무슨 일을 하든 선하다는 위험한 믿음이 전제돼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애니메이션에서 딸이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는 더 위험한 짓을 하는 바람에 ‘악당’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주장할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TV를 끄고도 그 질문이 오래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그 잔상이 현실에 남아서 재생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러면서 궁금하다. 그이는 왜 몇몇의 히어로에 의해 구원되는 사회를 반대하면서 ‘저 홀로’ 몇몇의 히어로를 제거하려고 했을까. 그이가 악당이 된 건 그가 가진 논리의 부당함 때문일까, 자신의 논리를 합의 없이 저 홀로 관철시키려고 했기 때문일까. 나는 아무래도 후자 같다. 

난세를 구하는 건 영웅일까, 의인일까, 악인일까, 죄인일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하다. ‘오직 한 사람’의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는 그 한 사람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된다. 우리는 왜 사람의 자리에 제도와 시스템을 올려놓지 못하는 걸까. 제도와 시스템도 결국은 사람이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지만 유독 우리 사회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영웅서사에 기대어 그것들을 완성시키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누가 우리의 영웅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에게 왜 영웅이 필요한가도 한번쯤 물어봤으면 좋겠다. 

괴물이 되어버린 영웅을 보는 건 지금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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