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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어디를 돌아보아도 하루하루의 삶과 정신세계가 참으로 팍팍하고 힘든 요즈음이다. 긴 터널의 끝이 되어야 할 4·13 총선에도 아직 희망은 보이지 않고 신문과 방송은 매일 우리 사회와 국가의 결함과 문제를 상징하는 ‘헬조선’ 같은 새로운 용어들을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에 대해 만들어진 부정적 신조어들을 묶으면 한권의 백과사전을 편찬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가, ‘21세기 한국사회의 결함에 관한 용어사전’을 만들어보는 것은? 아마도 우리 세대의 병적 정신세계를 후대에 전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 같다.
요즘 언론에 떠도는 세태 진단을 보면 끝도 모르는 절망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세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은 중요하다. 언론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히 우리 자신의 셀프 이미지로 고착될까 두렵다. 모든 인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는 이미지는 나의 일상적 행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 이미지는 내가 겪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 그리고 주변이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의해 형성된다. 어느 날 퇴근길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한 가족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엄마는 딸아이의 손을 꼭 잡은 채 아들에게 얼음장처럼 쏘아붙였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 아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엄마의 이 메시지가 아이의 자기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인간에게 부모의 메시지는 특히 강력하다. 현대사회에서 언론은 또 다른 강력한 메시지의 권력이다. 노예는 처음부터 노예가 아니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노예상인에게 끌려갈 때 노예선상의 그들은 아직 자유인이었다. 자유인이기에 저항하고, 적어도 잠을 잘 때에는 자유를 꿈꿨으며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인간은 내면으로부터 노예가 되기 전에는 노예가 아니다.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고 생각, 정서, 육체의 생리까지 예속되고 나면 완전한 노예가 된다. 강요된, 그리고 학습된 무기력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메시지, 이 메시지가 우리의 삶 하루하루를 팍팍하게 만들뿐더러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강렬한 내면 이미지가 고착되어 우리의 생각, 정서, 육체의 생리까지를 점령할까 두려운 것이다. 무기력의 노예로 만들까 두려운 것이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요즘 사람들은 ‘우리가 이 나라를 떠나야 할 이유를 모두 나열해보세요’ 같은 문제를 내걸고 누가 더 많은 답을 찾아내나 골든 벨 퀴즈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 문제를 뒤집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그럼에도 우리가 이 나라에서 버티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두 나열해보세요’, 혹은 ‘모두가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살아갈 수 있는 국가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나열해보세요’. 문제 자체에서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지만, 그럴수록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21세기 한국사회의 결함에 관한 용어사전’이 아니라 ‘21세기 최악의 역경을 딛고 일어설 희망의 용어사전’을 만들고 싶다.
끝도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에 한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비난이 벌써 귀에 들리는 것 같지만, 내친김에 위의 퀴즈 문제를 한 번 더 꺾어 볼까 한다. 이렇게 바꾸면 어떤가? ‘이 정도로 바닥을 쳤으니 이제 튕겨 올라갈 가능한 경로를 모두 나열해보세요’, ‘바닥을 치도록 하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무엇입니까?’ 극한의 무기력을 극복하려면 용수철 같은 회복 탄력성이 필요하다.
인생은 원래 역경으로 가득 차 있지만, 희망이야말로 더욱 강하게 튀어 오를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의 원동력이다. 튕겨 올라가려면 메시지에 희망을 담아야 한다.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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