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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공감]기울어진 김장 노동

opinionX 2017. 12. 13. 11:29

지난 주말 드디어 김장을 끝냈다. 그동안은 11월 중순에 했으니 다른 해보다 많이 늦었다. 김장을 끝내자마자 한파가 닥친다. 땅 파고 장독 묻어 김치를 보관하는 환경도 아니고, 플라스틱 용기에 켜켜이 담아 냉장고에 넣고 살면서 다행이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고 보니 엄마가 늘 하던 소리다. 꾸물거리다 배추 얼면 큰일이라고 가을 끝자락이 오기도 전에 김장을 서둘렀던 엄마다. 우리 집 김장은 단맛을 연시로 내기 때문에 연시가 나오는 철에 미리 사서 꽁꽁 얼렸다가 썼다.

처음으로 혼자 김장을 했던 작년에는 연시가 가을 내내 나오는 줄 알고 엄마가 연시 사둬라 잔소리하는 걸 흘려들었다가 놓치고 다른 과일을 썼다. 올해는 엄마가 없는 첫 김장이지만 엄마가 잔소리하던 것들 하나도 안 놓치고 다 넣었다. 넣지 못한 거라면 엄마가 해마다 직접 걸러주던 멸치액젓이다. 매실액이며 고춧가루에 다진 마늘까지 엄마가 챙겨놓은 재료가 가득한데, 멸치액젓만 똑 떨어졌다. 내년 김장에는 매실액도 사서 써야겠지. 아쉬워하면서 엄마가 없어도 엄마가 담그던 방식으로 김치를 담는다. 삶이란 게 참 묘하다. 눈을 뜨면 날마다 새로운 날이지만 실상 삶의 관성은 어제를 포함한 기억 속에 있다. 살아봤던 시간의 습관으로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더듬어 가는 것, 현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거인 그런 게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출처:경향신문DB

내 어렸을 때 기억 속 김장은 이웃 품앗이 노동이었다.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은 집도 아니고 방이었다. 대문을 열면 화장실이 있고, 그 뒤로 부엌 딸린 방이 있고, 부엌 앞에 두 칸 계단이 있는데, 내려서면 수도꼭지를 중앙에 둔 마당이었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장독대가, 한쪽에는 넓은 마루에 양쪽 방을 지은 주인집이 있었다. 마당을 두르고 세 개의 셋방이 더 있었는데 하나만 빼고 나머지는 부엌이 딸린 방이었다. 부엌이 딸린 방은 살림집이라는 뜻이고, 그건 김장을 하는 집이라는 의미였다. 김장은 돌아가면서 했지만 어느 김장이든 마당에 있는 가구가 함께 참여했다.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그랬다. 어느 집 김장이든 네 가구의 손이 다 들어갔고, 그 집에 사는 동안 해마다 김장은 네 번이었다. 가난한 동네 가난한 마당이니 돼지고기를 삶는 일도, 알 굵은 굴을 사서 버무리는 일도 거의 없고, 잘 절인 배추 속잎에 뻘건 무채 속만 올려 갓 지은 밥 한 그릇 먹는 게 다였지만 그래도 꼭 잔치 같았다. 아 맞다, 프림 설탕 잔뜩 넣은 뜨거운 커피도 그날은 한두 모금 홀짝 얻어먹을 수 있었다. 아무리 서둘러도 차가운 공기에 이미 얼음장 같은 수돗물로 해야 하는 일. 고기는 못 삶아도 하루 종일 아궁이에 국솥은 올려놓았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방식의 김장은 재개발로 마당에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끝났다.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 공간에서도 품앗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옛날 이웃 공동체 방식의 품앗이와는 느낌이 좀 다르다. 마당에서 하던 걸 마루에서 하려니 좀 허전하기도 하고. 대신 양도 많이 줄었다. 일이야 많지만 자기 먹을 몫만큼의 일이고 한 해 한 번이기도 하고. 나는 김장이 제3의 명절 노동으로 취급된다는 걸 결혼한 후에 이웃 주부들을 보고야 알았다. 시댁에는 김장문화가 따로 없어서 적잖은 집에서 본 적도 안 적도 없는 일가친척들 겨울 양식 준비해주느라 며느리들만 명절 노동하듯 불려가는 것도 몰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김장은 여전히 여자들의 몫이다. 나는 왜 그걸 인식하지 못했을까. 고난은 내가 그 한가운데에 서 있지 않을 때에만 위대하다. 노동도 모성도 늘 바깥에 서 있는 자들이 아름답게 말한다. 얼마 전 아이의 영어 수업 시간에 한국의 김장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외국인 교사가 집에서 김장 도와본 적 있는 사람을 물었는데, 여학생은 모두 손을 들고, 남학생은 단 한 명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남학생들은 영어를 이해 못한 걸 거야. 농담하듯이 넘겼는데, 정말로 그 데이터가 농담이거나 아주 드물고 특수한 사례였으면 좋겠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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