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술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모습을 드러낼 뿐”이라 했던가.

가족여행으로 바닷가 경치 좋은 숙소에 모여 유쾌한 저녁시간을 보내던 날이었다. 신선한 해산물에 적당한 알코올까지 더해져 행복감에 빠져들 즈음, 동생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화살처럼 심장에 박혔다. “누나는 늘 이성적인 사람이잖아.”

평소라면 웃고 넘어갈 말이었다. 동생의 성품을 알기에 비꼬거나 공격이 아니란 것도 알았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는 집안에서 가장 이성적인 역할을 맡아 온 구성원이고, 그로 인해 신뢰를 얻고도 있다. 한데 그날은 왜 그토록 마음이 아팠던 것인지. 가족 간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잃은 기분이었다. 괜히 서러워 혼자 울었다. 분명 술 탓이었다.

초등학생 무렵 엄마는 자주 아프셨다. 동생들과 나이 차가 크다 보니 엄마 역할을 대신했던 적이 많았다. 매일 저녁 집 안을 청소하고 아장거리는 동생들을 씻기고 챙기는 열 살 소녀를 보며, 동네 어른들은 애가 애 같지 않다고 했었다. 

사춘기 시절은 학업 문제로 독립해 친척집에서 살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더욱 커졌다. 어둡지는 않았지만, 달콤한 소녀감성에 내 꿈만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젊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딸이자 장남, 자식이자 부모, 함께지만 홀로서기 사이를 오가며 3남매보다는 3형제에 가깝게 살아온 내가 보였다.

배우 정유미가 출연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얼마 전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았다. 모두가 주인공 지영을 논하고 있을 때, 내 눈엔 그의 언니 은영이 들어왔다. 늘 씩씩하고 사리분별 잘하고 할 말 다하는 듯한 지영이의 언니 은영은 가족을 생각하며 자신의 꿈과는 다른 직업을 살아간다. 무심하게 오래전의 선택을 이야기하는 그에게 남동생은 “우리 누나 철 들었네”라며 놀린다. 영화 속 삼남매는 충분히 좋은 사람들이지만, 어쩐지 난 그들보다 은영을 조금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주인공 김지영은 욕망을 억누르며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누적된 상처가 우울이 되었고, 불합리한 세상 속에 소진되어 가는 자신을 추스르느라 타인을 살필 여유는 많지 않다. 지영의 남동생 역시 따뜻한 사람 같지만 누나들이 세상에서 겪는 일들을 다 알지 못할 것이다. 그가 아픈 누나를 위해 사온 빵은 자신이 좋아하는 단팥빵이다.

반면 은영처럼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돌봄을 받는 것이 어색한 이들은 좀처럼 울지도 아프지도 않는다. 부모의 마음으로 살아가기에,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기보다는 아픈 사람이 없는 세상에 관심이 많다. 때로 그들은 투사처럼 보이고 사랑스러움보다는 논리로 무장을 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이익과 편리 추구에는 소극적이다. 이성적이고 당당해 보이는 그들은 많은 것을 가진 듯하지만, 정작 자신은 쟁취하거나 성공했다고 느끼지 못할 때도 많다. 남보다 앞서거나 위로 오르는 것을 바란 적이 없어서다. 나는 이런 은영이들을 무수히 알고 있다.

여성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쟁 같은 삶 속에서 각자 맡아야 할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며 살아가지만, 누구나 가슴에 작고 여린 아이 하나쯤 산다. 

상처 없는 사람도, 늘 괜찮은 사람도 없다. 보여주지 못하거나 보이고 싶지 않은 다른 모습도 한두 개는 품고 살아간다. 어머님은 짜장면을 싫어하신 적이 없고, 아버지의 등엔 겨울바다 같은 외로움이 스며있다. 동생 역시 조용히 장남의 무게를 견디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성은 감성의 반대말이 아니고 이 둘의 합은 제로섬이 아니다. 이 둘은 한 몸이며, 이성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감성의 분출을 조절하는 밸브에 가깝다. 마음을 덜 드러낸다 해서 감성과 공감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주장이 덜하다고 해서 생각과 이성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늘 부족한 것은 타인에 대한 헤아림이다. 익숙함 속에 잊고 있던 서로의 배려와 희생을 돌아보는 세밑 풍경도 아름답겠다.

<박선화 마음탐구소 대표>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