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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대학나무

opinionX 2019. 12. 26. 17:13

조선 말 제주의 유학자 김양수는 감귤을 재배하던 제주 과원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촉감과 당유자 모두 다 숲을 이루어/ 섬나라 농사 밭에 가을빛이 깊어졌네/ 일찍이 꽃필 때는 하얀 눈을 뿜어내는 듯하더니/ 잠깐 새 얽혀진 가지에 황금덩이 녹아 부었네.”

제주도에는 많은 품종의 감귤이 있었던 듯하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제주도에 유배온 충암 김정은 <제주풍토록>에 아홉 종의 귤과 유자를 설명했다. 9월에 익는 금귤, 10월 그믐께 익는 유감·동정귤을 언급하면서 금귤과 유감은 알이 좀 크고 매우 달며 동정귤은 알이 작지만 맛이 시원하다고 했다. 이와 함께 청귤, 산귤, 감자, 유자, 당유자, 왜귤 등을 말하고 으뜸은 청귤이라고 했다. “(청귤) 묵은 열매는 달기가 꿀에 섞은 것 같다”고 했다. 정조 때 제주목사를 지낸 조정철은 15개 품종의 귤을 말하며 유감을 두고 “향내가 입안에 가득하며 상머리에 두면 한 개의 향기가 방 하나를 채운다”고 적었다. 

제주도 감귤은 진상품으로 유명했다. 고려 때 팔관회 행사에 귤이 동원됐다는 기록이 있다. 본격적인 진상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다. 매년 20차례에 걸쳐 진상품으로 조정에 올라갔는데 그때마다 3000~7000개의 귤이 동원됐다고 한다. 성균관 등에서 유생들에게 과거를 보게 하고 귤을 나눠주는 특별과거인 황감과가 있었다고 하니 감귤의 인기를 짐작하고 남을 만하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진상품 귤이 늘면서 농민 고통은 가중됐다. 낙과는 농민의 책임이었고, 처벌을 피하기 위해 관헌들에게 대접해야 했다. ‘귤이 사람을 잡는 일’이 생기고 농민들은 귤나무를 베어버렸다. 많은 토종 귤나무들이 사라졌다. 현재 제주도에서 재배되는 대부분은 1911년 일본에서 도입된 온주 계통의 감귤이다. 감귤이 귀하던 시절 감귤나무는 몇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어 ‘대학나무’라 불리기도 했다. 이젠 대량재배로 옛날 같은 대우는 꿈일 뿐이다. 

올해 제주도 감귤값 하락으로 농민들 속이 타고 있다고 한다. 팔아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귀하고 천한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부족하면 귀하고, 흔하면 천한 대접을 받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 같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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