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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예능 프로그램인 만큼 몇 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흥미로웠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스태프들에게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알아낸 다음(성선설 쪽이 좀 더 많았다) 토론 후에 생각을 바꾸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일종의 룰이었다. 그런데 토론이 끝난 후에는 처음과는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출연자들의 개인적 재치와 말솜씨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스태프들은 마음을 바꿔 성악설을 주장한 쪽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인간 본성의 선악에 관한 논쟁은 인류의 역사와 맥을 같이해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은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저 하늘에 해와 달이 있고 하루 중에 낮과 밤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도 할 수 있다. 적막한 밤, 홀로 깨어 자신의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즉 대체로 나의 본성은 선하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때로는 그럴 수 없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사이코패스는 대뇌의 구조가 일반인들과 다르니 그들은 차치하고 말이다.

어느 정신의학자는 인간이 칭찬보다는 비판에 능하고 신뢰보다는 피해의식과 불신을 갖기 쉬운 이유를 우리의 뇌에 이미 입력된 기본적인 프로그램, 즉 집단 무의식과 연관해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먼저 볼 수밖에 없으며, 상대가 나를 이롭게 할 것인지 아닌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피해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집단 무의식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앞서 예를 든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린 분노하는 법을 배우지 않지만 누구나 쉽게 분노한다. 그러나 분노를 참고 상대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좀 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법정 스님도 ‘최고의 종교는 친절과 칭찬’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미국 작가 헨리 제임스 이야기도 있다. 그를 존경하는 누군가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지혜에 대해 한 말씀만 해 달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친절하고, 친절하고, 또 친절한 사람이 되어라.”

법정 스님과 헨리 제임스도 그것이 매우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굳이 그런 식의 표현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반면에 앞서도 언급했듯이 화를 내는 것은 쉽다. 물론 상담을 하다 보면 상대에게 화를 내고 싶어도 화를 내지 못해서 속상하다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이야기를 나눠보면 당사자 앞에서 바로 그 순간에 화를 내지 못하는 것뿐이다. 혼자 있을 때는 당연히(!) 그 사람 욕을 하거나 누군가에게 불평불만을 털어놓거나 해서 화난 것을 표현한다. 그들이 괴로운 것도 나를 화나게 한 사람 앞에서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지 못했다는 분노의 감정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누구나 화를 낼 만큼은 낸다는 이야기이다.

반면 상대가 받고 싶은 만큼 칭찬을 못해 줘 속상하다는 사람들은 만나기 힘들다. 물론 나도 그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인간의 이중적인 속성에 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에 나의 그런 면에 대해서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으려고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두 마음 사이에서 균형과 상식을 찾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정신과 수련의를 시작할 때는 ‘왜 우리가 상식대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갖고 고민한 적도 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할수록 상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상식대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느끼고 있다. 마치 시소가 올라가거나 내려가 있지 않고 평행을 이루는 순간이 아주 찰나인 것처럼 상식의 순간 역시 찰나에 머무르고 마는 느낌이라고 할까.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시소가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칭찬과 친절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마음으로 저무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할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양창순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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