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반 칼럼

[공감]밀려나는 사람들

opinionX 2018. 12. 19. 10:46

생활반경이 좁은 편이다. 집 근처 마트나 세탁소, 빵집 정도를 뱅뱅 돌며 산다. 대략 이삼백 미터 반경 내외에 있다. 조금 멀리 나가면 시장이나 도서관이다. 버스로 대여섯 정거장 정도 거리인데 자주 걸어 다닌다. 어떤 날은 그 거리를 직진으로 가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로 돌아서 걸어간다. 그래 봐야 걸음 수를 측정하는 앱으로 계산해서 만보도 되지 않는 거리다. 그래도 그 길이나마 걷는다. 미세먼지 경보가 높은 날도, 어떤 날은 마스크조차 하지 않고 걷는다. 왜 그렇게 걷느냐고 물으면 운동하느라 걷는다고 대답하지만 절반은 거짓말이다. 내가 걷는 길의 반경은 운동하기에 적합한 길도 아니고, 운동이 될 만한 속도로 걷지도 않는다.

내가 밖으로 나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신문과 잡지, SNS에서 읽는 세상 말고, 내가 사는 세상의 실재를 느끼고 싶을 때다. 글을 쓰니 사람들이 작가라고 부르지만 글 쓰는 직업이란 글을 쓰는 순간에만 직업이고, 쓴 글 중 대부분의 글은 세상에 닿지 못한다. 소득이 되지 못하는 건 물론이다. 소속이 없으니 동료도 없고, 주위 학부모들과 어울리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히키코모리형 전업주부의 삶이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세상 편한 삶이고, 누군가에게는 세상 답답한 삶이다. 내 마음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늘 갈팡질팡하는데, 어느 쪽일 때든 그 삶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마음으로 나서는 길이라 일부러 사람 많은 지역을 골라 걷는다. 다행히 사는 지역이 애매해서 그렇게 크게 돌다 보면 빌라와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과 오래된 재래시장과 대형 빌딩 숲을 끼고 있는 전철역을 다 거치게 된다. 그 길을 걷다 어느 순간 연말이라는데, 세밑이라는데, 반짝거리는 트리 장식도 못 보고, 익숙한 캐럴도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트리 대신 나는 시장의 오래된 가게가 하나둘 문을 닫는 모습을 본다. 어느 날은 구석에서 손님이 없어 고전을 치르던 가게도 아니고, 가장 좋은 자리에서 손님들로 북적이던 가게가 맥없이 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 그런 걸 보면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저들은 이제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어디가 됐든 밖으로 밀려날 것이다. 자본이 가진 힘은 늘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한번 밀리면 계속 밀려난다.  

연말이 되면 떠오르는 일이 있다. 초등학교 3, 4학년 때의 일이었던 것 같은데, 동네에서 가장 큰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던 청년이 12월의 마지막 날인가 그 전날이던가,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 술에 취해 온 동네의 대문을 두드렸다. 모든 집의 대문을 두드린 건 아니고, 외상이 있는 집 대문만 두드렸다. 손으로도 두드리고 발로도 두드리고, 그렇게 해서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채로 외상값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끝내 모른 척한 집도 있지만 오밤중 소동에 놀라 여기저기 급하게 돈을 꿔서 외상값을 갚은 집들도 있었다. 그 돈을 모두 챙겨 청년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며칠 후에야 돌았다. 월급 몇 달 밀렸더니 그 사달을 쳤다며 중국집 사장이 혀를 차더라고 했다. 평소에 종업원을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기로 소문난 사장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사장에 대한 원한으로 주인집 외상을 떼먹고 달아난 겁 없는 청년이라고 욕했다. 나도 그렇게 기억했다.

그가 몇 달의 월급 대신 모욕을 받아야 했던 젊은 체불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나이를 먹고 나서의 일이다. 그가 그때 가져간 돈은 밀린 월급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돈을 들고 그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다른 어딘가에서 비슷한 모욕을 또 감당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행복은 되풀이되지 않는데, 불행은 반복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안쓰럽지만 그 청년의 행동이 옳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 방식인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출구 없는 모욕과 비참만 남아 있을 때, 정의는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수시로 생각해보는데, 요즘은 이런 질문마저 바닥에 묶인 어떤 삶들에 대한 무례인 것 같아 차마 묻지 못하겠다.

<한지혜 | 소설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