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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가수 산이(SAN E)씨는 라이브 공연 중 “여기 오신 워마드, 메갈 너희들한테 한마디 해주고 싶은 건, 워마드는 독, 페미니스트 노(no) 너네 정신병”이라고 외쳤다. ‘F’로 시작하는 욕설에, “군대 안 가는 여자는 평등을 말하지 마라”는 가사도 있었다.

이 ‘작은’ 소동은 다방면으로 흥미롭다. 관객의 90% 이상이 여성인데 고객에 대한 거침없는 비하 발언. 이 반(反)자본주의 정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백인 가수가 흑인 관중 앞에서 “검○이, 너네 정신병”이라며 노래할 수 있을까. 또한, “정신병” 비유는 정신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건강 약자에 대한 모욕이다. “뭘 더 바래, 지하철 버스 주차장 자리 다 내줬는데”. 이 가사는 국가의 저출산 극복 노력을 정면으로 비웃는 ‘반사회적’ 발언이다.

압권은 뻔뻔스러움이다. 정작 본인은 미국 국적자로서 군대에 가지 않았으면서,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병역에서 배제된 여성을 ‘꾸짖고 있다’. 그는 한국의 현역 복무자들의 고생에 무임승차하면서, 마치 ‘해병대 출신’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소속사 대표는 “아티스트는 신념과 소신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의 생각을 소중하게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며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예술가는 사회 밖에서 혹은 사람 위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홀로코스트나 제국주의 침략을 옹호하거나 난민, 이주자, 장애인을 혐오하는 것은 신념이 아니다. 이 모든 사연이 너무 황당하다보니, 단지 인기 없는 가수의 노이즈 마케팅일 뿐이었는데, 매체가 지나치게 반응해주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이 군대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남성을 군대에 보내는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국가다. 그런데도 “남성=군대”라는 이 절대 논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모든 국민은 병사가 되어야 한다는 1950년 국민개병제(皆兵制) 도입 그리고 1962년 국방부가 직할했던 시·도(市道) 병무청이 설립될 즈음, “병사구사령부(병무청의 옛 이름)는 조폐공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돈으로 병역을 면제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리, 거부, 기피, 특례 등으로 모든 남성이 군대에 가는 것은 아니고, 모든 남성이 현역으로 복무하는 것도 아니다. 비리가 아니더라도 남성의 징집률은 당대의 인구수와 학력 구조, 고용시장의 상황에 따라 조절된다. 1986년에는 전체 징병 대상자 중 51%만이 현역으로 복무했지만, 저출산으로 인해 2013년에는 91%가 현역 판정을 받았다.

이회창씨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가지 않아서 두 번의 대통령 선거를 좌우할 만큼 역사가 되었다. 특히 이씨의 장남은 1차 신체검사에서 키 179㎝, 몸무게 55㎏으로 현역 판정을 받았으나 2차 때는 45㎏으로 면제되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너무 말라서” “너무 아파서” 군대에 가지 않았다. 전 총리들 중에는 정운찬, 김황식, 황교안 총리가 가지 않았다. 2010년 서해교전 때 불에 탄 보온병을, 북한군의 포탄이라고 주장한 ‘보온병 사건’의 주인공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도 미필자다.

징병제는 근대 국가 이후에 등장한 인류 역사상 가장 역사가 짧은 모병(募兵) 제도이다. 징병제는 신분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남성의 대중화, 국민화 기획이었으나 그 목표를 달성한 국가는 없다. 어느 사회나 돈과 권력으로 징집을 피하는 계층이 있었다. 혹은 여호와의증인처럼 특정한 신념을 가진 이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 경우도 다반사다.

모든 남성이 군대가 간다는 통념은 애시당초 신화였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 남성의 복무 경험은 이전에 비해 매우 다양해졌다. 국방부의 정책대로, 병역은 점차 ‘취업과 자기 계발’의 경험으로 발전할지 모른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병무의 공정성과 사병의 인권이다. 지금처럼 군복무 여부와 보직이 ‘수저’색의 영향을 받는 상황은 계급 투쟁을 촉발시킬 ‘위험’이 있다. 2018년 한국 사회의 키워드 중 하나는 젠더 전쟁이었다. 성차별을 자각한 여성들은 더 이상 참지 않는다. 당대 병무의 공정성은 성별 차원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헌법 제39조 1항에 적시된 대로, 여성은 병역은 아니지만 넓은 의미의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

남성 내부의 계급 차이가 병역 비리의 온상이다. 병역 비리는 자신과 자기 자식은 군대에 안 가면서 국가안보를 강조하는 집단에게 ‘끌려가는’ 남성들이 저항할 때만 해결될 수 있다.

<정희진 |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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