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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마다 다음 날 아침에 살아서 깨어나기를 기도하며 잠든다던 친구가 있었다. 잠자는 중에 영영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경건해지고 미운 감정과 뒤틀린 심사가 가라앉으며,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는 이유였다. 친구는 오래전 벗들에게 시집을 선물하면서 속지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썼다. 그는 수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이 글귀는 아직까지도 유언처럼 귓가에 맴돈다.

‘죽음을 기억하라’, ‘자신이 언젠가 죽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이 문구는 살아있다는 것의 오만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중세 유럽을 휘몰아친 흑사병은 사람들의 인생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거리에 시체가 널려있는 광경에 익숙해졌고 인간의 주검과 해골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져 갔다. 저명인사들은 자신이 장래에 묻힐 무덤에 소름 끼치는 죽음의 경고 표시로 썩어가는 자기 시신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메멘토 모리’라는 메시지를 자신과 세상에 던지려는 것이었다. 이런 풍습은 19세기 초까지도 이어져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죽은 연인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벽에 걸어두는 기이한 행위가 유행했다.

죽음을 기억하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톨스토이는 ‘우리 모두 언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삶은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가지리라. 30분 후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 가까운 친척 한분이 뜻밖의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얘기를 엿들을 수 있었다. 고인이 자신의 운명을 알았는지 사고가 나기 며칠 전, 다소 사이가 좋지 않던 이웃 몇 사람을 초대해 덕담을 나누고 풍성하게 대접했을뿐더러 귀한 패물까지 나눠주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고인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예감하고 세상에 남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할지를 걱정했을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면 우리의 삶은 이렇게 달라진다. 그렇다면 높은 자리든 낮은 자리든 각자의 지위에서 물러난 이후를 기억하고 의식한다면 우리의 재임 기간은 어떻게 달라질까?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언젠가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권력을 아무렇게나 휘두를 수 없다.

퇴임 후를 의식한다는 것은 권좌에서 물러난 뒤 후세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퇴임 후에도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권력의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발버둥쳤지만 모두 무위로 끝나고 추한 모습만 드러내고 말았다. 더구나 사회관계망서비스로 상징되는 21세기 정보망 속에서는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정보화 시대에 들어선 이후 결코 변하지 않을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이 파헤쳐지리라’는 것이다. 21세기 ‘메멘토 모리’의 표식은 파헤쳐진 무덤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메멘토 모리’가 경고라면 삶의 궤적은 묘비명이나 평전에 남는다. 나의 사후에 내 묘비명에는 어떤 글이 새겨질까?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사랑하던 애견에게 바친 ‘어느 뉴펀들랜드 개의 묘비명’에는 ‘여기에/ 그의 유해가 묻혔도다./ 그는 아름다움을 가졌으되 허영심이 없고/ 힘을 가졌으되 거만하지 않고/ 용기를 가졌으되 잔인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덕목을 가졌으되 악덕은 갖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에 의하면, 이 묘비명 밑에는 ‘오, 노역으로 타락하고 권력으로 부패한 인간, 시간의 차용자여, 당신의 사랑은 욕망일 뿐이요, 당신의 우정은 속임수, 당신의 미소는 위선, 당신의 언어는 기만이리니!’라고 새겨져있다고 한다. 기껏해야 시간의 차용자인 주제에 마치 영원히 살듯이 온갖 악행을 쌓아가는 우리의 존재가 죽음을 기억하고 퇴임 후를 의식하며, 자신의 묘비명에 어떤 문구가 새겨질지를 성찰하면서 살아간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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