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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의대 입학동기인 의사 다섯 명이 병원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TV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즐겨 본다. 흥미로운 것은 의대생이나 의사 유튜버들이 이 드라마를 리뷰하는 동영상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이 드라마 속 의사들에게 특히 감정이입하는 대목은 멋진 장면이 아니다. 컵라면, 즉석밥, 과자로 끼니를 때우며 피곤에 절어 지내고, 경험 많은 교수의 질문 공세에 답을 못 찾아 진땀 흘리는 모습들이다. 무엇보다도 실제 의사들은 “의사가 환자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뿐”이라는 드라마 속 대사에 공감했다. 이는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의사 리외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닮아있다. “인간의 구원이란 나에게는 너무나 거창한 말입니다.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없습니다. 내 관심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건강이지요.”
최근 정부가 코로나19를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의료진을 격려하는 ‘#덕분에 챌린지’ 캠페인을 시작했다. 수어로 존경과 자부심을 뜻한다는,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으로 받친 모습을 상징으로 삼아 국민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 등을 통해 이를 확산해주기를 제안했다.
입는 것 자체가 전쟁을 치르는 일일 것 같은 레벨 D 보호복 차림으로 앉은 채 쪽잠을 청하는 의료진의 모습을 방송 뉴스에서 보거나, 고글과 마스크가 닿는 부위마다 밴드를 붙인 상처투성이 얼굴의 간호사들 사진을 모자이크 벽화처럼 이어 붙이고 ‘한국 간호사들의 밴드, 명예의 배지가 되다’라는 제목을 단 외신을 보며 나 역시 뭉클함과 감사, 자부심이 뒤섞인 감정으로 먹먹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영웅 서사들이 잊게 하는 것이 있다. 아무리 책임감과 성실성으로 자신을 던져 일하고 있다 해도 의료진은 일하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하고, 자신의 노동에 합당한 보상을 필요로 하는 보통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3월 한 달간 파견을 자원해 대구의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에서 일한 간호사 김수련씨가 페이스북을 통해 전하는 간호사들의 목소리를 읽다보면, 과연 의료진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것만으로 충분한가라는 면구스러움에 고개가 숙여진다. 코로나19 방역의 맨 앞줄에 서서 일하는 간호사들은 환자 간호라는 본질적인 일에 더해 환자 대소변 치우기, 옷 갈아입히기, 배식, 밥 먹이기, 병동 청소에 물품 정리, 애타는 환자 가족들의 전화 응대까지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을 한계상황을 넘어서까지 해결하는 방패막이다. 그러나 ‘비상상황’이라는 이유로 안전하고 충분한 보호구나 숙소, 식사, 보상은 물론이고 충분한 자가격리 기간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차출되었다가 복귀 통보를 받는 간호사들도 있다. 당장 이달 초 대구 지역의 한 코로나19 전담병원에서는 임상병리사, 간호조무사 등이 포함된 계약직 35명에게 계약 만료를 통보했다가 논란이 되자 방침을 재검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끝나길 바랍니다. 시민 여러분 모두가 평온한 일상을 되찾기를 바라요. 그렇지만 모든 일이 끝나면 빛나는 명예는 간호사들을 가장 착취했던 사람들이 가져갑니다. 가장 앞에 섰던 간호사들은 혹사당한 몸과 실망을 끌어안고 가장 아래, 안 보이는 곳으로 파묻힙니다. (중략) 시민 여러분에게는 간호사들의 얼굴에 붙은 스티커와 붉은 자국만 전시되었지만, 정작 간호사들을 짓누르는 불안은 투명합니다.”(김수련씨 페이스북에서)
K방역의 세계 표준화라는 자부심에 들떠 정작 그 K방역을 떠받치느라 자신을 갈아넣은 사람들을 놓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우선순위가 제대로 정해지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염병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신화 속 영웅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은령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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