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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 을지로의 국도극장에서 엄마가 일했던 건 1980년대 초반이었다. 어느 방학엔가 우리는 엄마가 일하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뽀빠이와 토순이의 세계일주>라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동안 엄마가 우리가 잘 앉아 있는지 확인하느라 몇 번인가 비상구를 통해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좀 헷갈린다. 우리가 앉아 있던 곳이 비상구 근처의 좌석이었는지 아니면 비상구 근처의 계단이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무려 사남매였다. 엄마는 한때 그 극장의 청소노동자였다. 청소노동자에게도 네 장이나 되는 초대권을 줄 정도로 인심이 넉넉했던 시절인지 아니면 청소노동자가 극장 계단에 자신의 자녀를 앉혀놓는 정도는 눈감아주는 인정의 시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형편을 뛰어넘는 엄마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전자였지 싶다. 아니다. 엄마가 표를 샀을지도 모른다. 그 극장에서 영화를 본 기억이 그날이 유일했던 걸 보면 그랬을 수도 있다. 엄마가 극장에서 청소를 해서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문장이 내가 이해한 그날의 정황 전부다. 엄마 덕분에 처음 접한 대형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낯선 세계의 모험이 신기하고 또 신기하기만 했다. 엄마가 극장에서 청소를 하는 사람이라서 좋았다.연휴 내내 청소노동자의 “염병하네” 한마디가 화제였다. 특검에 소환된 최순실이 민주주의를 언급하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고 근처에 있던 청소노동자가 던진 말이 동영상에 잡혔고, 그 동영상을 본 다수의 언론이 주로 ‘청소아줌마의 사이다’라는 식의 제목을 뽑아 기사화했다. 민주주의를 훼손한 자가 민주주의를 들먹이는 상황에 대한 황당함과 그 황당함을 욕설로 일갈한 이에 대한 공감이야 다르지 않지만, 그러한 공감과 별개로 나는 ‘청소아줌마의 사이다’라는 식의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의 태도가 좀 불편했다.
처음에는 동영상 속 그들의 무반응이 의아했다. 처음 본 동영상 속 취재진은 그 돌발 상황 앞에서 매우 침착해 보였다. 방송보도용 영상이 아니니 누구 하나의 쓴소리 한마디는 담겨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분노하지 않는 이성이 취재진의 자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침묵과 직무정지인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취재도구도 갖추지 않고 모인 모습이 겹쳐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편한 건 아무래도 호칭이었다. 호칭은 종종 한 존재에 대한 사회적인 규정이다. 동시에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 사이의 계급적 관계를 드러낸다. 몇몇 언론이 지적을 받아들여 ‘청소노동자’ 혹은 ‘청소근로자’로 고치기도 했으나 그제야 용어를 고치는 것이 언론의 무의식이었다면 또한 문제지만, 과연 그것이 무의식에 따른 용어 선택이었을까 싶다. 아무래도 ‘청소아줌마’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그러니까 그들이 기사화하고 싶었던 내용은 청소노동자가 일갈한 내용 자체가 아니라 한 나라의 국정을 제 맘대로 주무른 소위 비선 실세가 ‘청소아줌마’에게도 욕설을 듣는, 권력의 끝과 끝에 서 있는 자들의 역설적 처지였을 것이다. 동시에 굳이 ‘아줌마’라는 표현을 썼던 것은 최순실을 ‘무식한 강남아줌마’로 규정했던 의식 그대로의 대립항이었을 것이다. ‘아줌마’라는 호칭에 존중의 의미가 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언론의 용어 선택이 실수라기보다는 의도적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용어 선택은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차별적이었다.
말의 정치적 함의를 언론이 모를 리 없다. 최순실만 민주주의를 외쳤나. 지금의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언론들도 이 정권을 탄핵하기 위해 모인 촛불광장 사진을 싣고 ‘민주주의 만세’를 말하지 않았던가. 단어 몇 개의 정치적 함의를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일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태도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묻고 싶다. 우리가 과연 같은 숲에서 길을 잃었는지. 우리가 과연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지. 아니라면 과연 우리가 같은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탄핵심판은 아직 진행 중이고, 아무것도 결정 난 것은 없다.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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