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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최초의 백화점 봉 마르셰가 문을 열었다. 2만5000㎡의 매장에 아크등 360개, 백열등 3000개를 설치하여 휘황찬란한 빛을 밤거리에 뿌렸던 이 건물은 당대에 건립된 어떤 건물보다도 화려하고 웅장했다. 인류가 신전과 궁궐 건축에 쏟았던 예술적 열정과 창의성은 이제 상품을 전시하는 건물로 옮겨졌다. 무고한 군인을 간첩으로 몬 프랑스판 조작 사건인 ‘드레퓌스 사건’에서 양심과 진실의 편에 섰던 에밀 졸라는, 그다운 통찰력으로 이 건물의 본질적 위상을 정의했다. “백화점은 현대의 신전이다”라고. 이는 당대 최고의 건물/시설에 대한 헌사였을 뿐 아니라, 후일 이 건물/시설이 수행할 역사적 역할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세계 도처에는 신이나 성인의 이적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은 성지들이 있고, 그곳에는 으레 옛사람들의 종교적 열정을 담은 신전들이 경이로운 모습으로 들어서 있다. 신전의 안 또는 주변에는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준다는 성물들이 있으며, 그 옆에는 어김없이 헌금함이 놓여 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유서 깊은 성소(聖所)에 가면 모두들 입을 벌리고 감탄하고 때로는 두 팔을 들어 감동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막상 헌금함에 고액권을 넣는 사람은 못 봤어요. 푼돈 넣고 잠시 소원을 빈 다음에 바로 돌아서죠. 게다가 이런 곳에서 자유 시간을 많이 주면 오히려 불평하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인솔하는 팀은 여행사가 꾸린 팀과는 달라서 일정에 꼭 쇼핑을 넣을 이유는 없으나, 그래도 큰 도시의 유명한 백화점에는 꼭 들러야 해요. 사람들이 정말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는 곳도 백화점이에요. 이런 곳에 들어가면 사람들 눈동자가 빛나고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요. 거기에서는 사람들이 거액을 ‘헌금’하는 데 주저하지 않아요. 그 헌금의 대가로 자기에게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받아들고서는 한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는데, ‘신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꼭 저런 표정을 짓지 않을까 싶어요.” 모 종교단체의 의뢰를 받아 신도들을 인솔하고 수시로 해외 성지들을 순례하는 지인에게 들은 말이다.

굳이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오늘날 아낌없이 헌금하고 합당한 은총을 받아 더 나은 인간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해 주는 곳은 어디에나 있다. 옛날 신전이 수행했던 역할을 현대에는 ‘욕망의 소비 공간’들이 수행하고 있는데, 이 신전들에 모신 신이 세칭 ‘지름신’이다. 에밀 졸라의 예언은 한 세기쯤 지나 국민의 대다수가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나라들에서 예외 없이 실현되었다.

물론 현대에도 수천년간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재해 온 신들을 위한 신전은 계속 건립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신전에 거(居)하는 신들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은총의 최종 주재자가 아니다. 그 신들은 더 강하고 위대한 신에게 가까이 가는 길로 인도해 주는 지위로 내려왔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전령의 신이자 상업의 신이며, 현대의 명품 브랜드 이름인 에르메스처럼.

대중소비시대의 최고신인 ‘지름신’은 신자들에게 어떤 윤리적 계율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 신을 모시는 신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투명봉투’ 따위에 넣을 헌금을 미리 준비해 둘 필요는 없다. 신전의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으며, 그 안에서는 아무도 양심을 긁는 따분한 설교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신의 전도사들은 어디에나 출입하며 겸손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교리를 설파한다. 거실의 TV 화면도, 영화관의 스크린도,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의 액정화면도, 심지어 대중교통 수단 내부의 벽면도 ‘지름신교’ 전도사들의 활동 무대다.

‘사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인간들의 합리적 선택이 시장을 확대, 발전시키며, 시장의 발전이 곧 역사의 진보’라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은, 지름신교의 권위 있는 교리 해설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시장에 대한 공적 개입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제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소유하려는 욕망에 드리워졌던 죄의 그늘은 사라졌다.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더 쓸 수 있는 물건을 버리면서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을 갖는 현대인은 거의 없다. “내 돈 내 맘대로 쓰는 데 남이 무슨 상관이냐?”, “있는 사람들이 펑펑 써 줘야 가난한 것들에게도 떨어지는 게 있다” 등의 말들이, 지름신교의 교리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대중적 기도문이다.

신은 언제나 영생불멸, 전지전능, 지고지선의 속성을 갖춘 존재였다. 그런데 현대의 지름신은 이들 중 ‘지고지선’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권능을 떼어내 버렸다. 이 신은 헌금하는 자에게 헌금하는 만큼만 은총을 베푸는 ‘공평한’ 신이다. 지름신교의 신자들에게 다른 신들이 금기시했던 탐욕, 사치, 오만 등은 더 이상 ‘악덕’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사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교리에 합당한 ‘합리적’ 행위이다.

사익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지름신교’ 교도들에게 천벌은 무의미하다. 그들에게는 ‘공동체’나 ‘공익’을 전제로 구축된 ‘죄악’에 대한 개념조차 없다. 지름신교의 교세가 커지는 만큼 모든 것, 심지어 공동체가 위임한 권력까지 사유화하여 사익을 극대화하려는 파렴치한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은 더 넓어질 것이다. 공동체의 파멸을 막고, 지름신에게 버림받은 가여운 영혼들에게 안식할 처소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는, 이 ‘사이비 종교’와 결별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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