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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부위엔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 머리, 팔, 다리처럼 덩어리로 구분된 경우도 있고, 정강이와 종아리, 엉덩이와 궁둥이처럼 섬세하게 구분된 것도 있다. 드러나는 부분만 아니라 장기와 핏줄, 근육, 뼈 등이나 뇌 속의 무수한 신경물질에도 이름이 있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분명 이름이 있음에도 대명사 ‘그것’ 혹은 ‘거기’나 애칭, 별칭으로만 불리는 부위가 있다. 몸속 어딘가에 묻혀 있는 것도 아니고 좀처럼 사용하지 않아 잊힌 것도 아니다. 강력한 존재감에 난도 높은 특명을 완수하고 있음에도 그렇다. ‘그것’은 마치 007이나 MI6로 불리는 비밀 특수요원처럼 남다른 능력과 기대로 인해 오히려 은폐된 존재다. 또한 생식과 배설, 성스러움과 속됨. 창조와 권태, 노동과 휴식, 자존감과 수치감, 숭배와 터부 등 수많은 모순된 역할과 감정 사이를 부유하는 양면성의 예술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그것’이 여성에게는 하나 더 있다. 젖가슴이다. 하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중적이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응집된 존재다. 남성들이 가장 숭배하는 곳이자 여성성의 상징인 곳. 그래서 은폐와 동시에 주목받기 위한 은근한 노출과 부풀림이 발생하는 곳이다. 무수한 영화제는 가슴을 최대한 노출한 여성 배우들로 가득하고, 보통의 여성들도 있는 살을 최대한 끌어모아 은근 슬쩍 유혹의 욕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밀당’의 고수랄까.

남성들은 여성의 가슴을 몹시 숭배한 나머지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금기를 요구했다. 살덩이는 슬쩍슬쩍 보여줘도 되지만 수유 기능을 가진 작은 돌출 부위만은 공식적으로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은 언제든 드러내도 되지만, 여성들은 상상조차 하게 만들면 안된다는 것이다. 뭔가 이상하지만 아무튼 여성들은 ‘작은 점’ 하나를 가리기 위해 아무리 더워도, 소화 기능이 약해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브래지어로 가슴을 압박한다. 80세가 넘은 나의 엄마는 브래지어가 살갗을 스치는 것이 아프다며 러닝 위에 입고 계신다. 관습이란 때로 기묘하다. 여성의 젖꼭지에 무슨 죄가 있다고.

조선 후기 풍속화나 사진을 보면 저고리와 치마 사이에 가슴을 훤히 드러낸 여성들이 많다. 아들 낳은 여성들의 자긍심이라는 설도 있고, 수유를 하는 여성들이 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여성도 가슴을 드러내는 것이 늘 금기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불과 100년도 안된 일이다. 금기와 터부란 그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문화 관습의 일부일 뿐임을 새삼 깨닫는다. 

최근 젊은층에서는 ‘여성의 신체에도 자유를 주자’는 탈브래지어, 탈코르셋, 노하이힐 등의 이슈가 자주 등장한다. 내용 자체로만 보면 논란거리가 되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신체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반하는 패션을 상시적으로 착용하는 것은 건강에 해롭다. 엄숙한 자리도 아닌 일상에서, 타인에게 보여주는 몸보다는 자신의 건강을 우선시하는 데 동의와 허락을 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서구에선 건강을 생각하는 브라리스 패션이 일상이 되었고, 남성들도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착용한 정장이 근무복이던 시대에서 해방된 지 오래다. 

한발 더 나아가 요즘은 남녀 모두 레깅스 패션을 선호한다는 기사를 읽는다. 중·장년 세대가 보기엔 다소 민망한, 하체의 모든 굴곡이 온전히 드러나는 발레복 같은 의상이 청바지와 더불어 필수 아이템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 칸 영화제엔 보통의 여배우들 의상과 달리, 다른 곳은 가리고 가슴만 온전히 노출한 반전 패션으로 시선을 모은 여성이 있었다. 아카데미 시상식엔 해마다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 남성 배우도 있고, 외국엔 남학생도 치마를 입을 수 있는 학교도 등장했다. 남성과 여성의 전형성, 금기와 터부에 대한 개념에서 점차 자유로워지는 시대가 흥미롭다.

<박선화 마음탐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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