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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다 전국 각지의 광장에서 100만 국민이 촛불을 치켜들고 있다. 청와대가 파렴치한 버티기로 돌아선 이번 주말엔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올 것이다. 타오르는 분노에도 엄청난 자제력으로 질서를 지키면서, 창의적이고 해학적인 퍼포먼스로 광장을 수놓는 100만 시위 행진에 전 세계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타고난 정치성과 예술성, 유머 감각이 촛불광장에서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군중을 동원, 통제하는 지도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어울려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촛불행렬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 같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것은 혼돈과 무질서로 비치겠지만, 우리가 속해있는 자연계에서 혼돈은 사실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생명체를 놓고 보자면 생물학적으로 가장 질서 있는 평형상태는 죽음이고, 혼돈은 생명의 본질이며 변화의 동력이다.

19일 부산 부산진구 서면 쥬디스태화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혼돈은 내면으로부터 솟구치는 너의 에너지와 나의 에너지가 광장에서 서로 융합하고 충돌하면서 서로를 향해 적응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열어가는 공간이다.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는 빅뱅의 전주곡인 것이다. 역사적 전환점에서 혼돈이 과거의 구조와 믿음, 체제를 완전히 허물어버릴 때 고도의 집단적 깨달음이 이루어지고 진실은 새로이 정의된다. 혼돈은 국가와 정치, 문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권력의 소재를 뒤집어 바꾸는 완전한 탈바꿈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고이다.

지금 넓게 열린 광장은 단지 분노를 표출하는 공간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광장은 국민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이상적인 국가, 사회에 대한 열망이 ‘자기조직화’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자기조직화란 사회의 구성요소들이 외부의 압력이나 영향 없이 스스로 혁신적인 방법으로 조직이나 생명체를 새로이 만들어나가는 현상을 말한다.

무생물로부터 생명체가 탄생하는 비밀도 자기조직화에 있다. 생물학자 카우프만에 의하면, 자기조직화를 통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려면 ‘자양분이 풍부한 환경, 다양한 물질요소, 요소들 간 연결의 복잡성, 상호적합성의 모색, 느슨한 사전 연결, 혼돈’이라는 여섯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복잡하게 서로 결합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다양한 물질이 하나의 가마솥에 섞이어 부글부글 끓는 상태가 되어야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광장은 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열망이라는 자양분을 가슴속에 가득 키워온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간에 복잡한 융합의 접점을 가지고, 사회연결망 서비스 같은 느슨한 연계를 통해 광장에 모여 분노의 구호와 창의적 이벤트, 집단대화로 상호결합을 모색하면서 부글부글 끓는 혼돈의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혼돈이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질서이며, 더 강력한 국민권력으로의 전진이다.

이 혼돈의 광장을 맥없이 마무리해서는 안된다. 1987년 6월항쟁이 역사의 일보전진을 이루었지만 진정 국민이 염원하던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미완의 혁신은 또 다른 악의 원천이 된다.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약한 대응은 더 새롭고 중대한 문제를 창출한다. 푸르른 잔디밭을 망치는 민들레의 줄기만 꺾고 그것을 제거했다고 믿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땅 밑에 도사리고 있는 깊고 넓은 뿌리가 줄기와 잎, 꽃을 다시 피워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광장의 국민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촛불이지만 마음속에 들고 있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불의를 활활 태워버리는 횃불이다. 횃불로 불의를 모두 태워버린 후에도 미래를 향한 염원의 촛불은 계속되어야 한다. 촛불광장은 국가란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답을 창출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자기조직화의 촛불광장에 간절한 염원을 실어본다.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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