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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살았던 동네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다. 아이들 여럿이 손을 동그랗게 잡고 둘러서야 잴 수 있을 정도로 허리 굵은 나무였다. 그늘도 당연히 넓어서 여름이면 그 아래 펼쳐진 커다란 평상 아래로 하루 내내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한강 가까운 낮은 지대에 있는 나무라 심한 홍수로 서울의 절반은 침수 피해를 입었던 어느 여름에는 그 나무도 불어난 물속에 잠겼다. 풍성한 잎만 물 위에 드러나 있어 멀리서 보면 작은 섬 같았다고 했다.
그 나무를 출입문처럼 지나가면 나오는 달동네가 재개발이 된 건 1990년대 초반이었는데, 뒤로 이어진 야트막한 야산을 다 파내면서도 그 나무는 베지 않았다. 오히려 비탈진 길을 평지 가깝게 만드느라 주위를 다 돋워 높이는 와중에도 나무 둘레에는 적당한 넓이의 단을 쌓아 뿌리가 다치지 않게 했다. 이 때문에 키가 작아져 예전의 높고 우람한 느낌은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그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사람들 사는 집은 다 부수면서 나무는 손대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는데, 어른들 말씀으로는 오래된 나무를 함부로 베면 동티가 나서 그런 거라고 했다. 개발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미신이라 웃고 넘겼는데, 나중에 재개발이 끝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보니 신기하게도 그 마을의 가장 오래된 나무는 훼손되지 않고 어딘가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중 적잖은 나무들이 시에서 지정한 보호수이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은 나무들도 제법 있었다.
아무리 재개발이 이뤄진 동네에도 가장 오래된 나무는 남아 있다는 것, 나는 그것이 갖는 의미를 상상한다. 기복적인, 미신적인, 주술적인, 그런 불가해한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런 믿음으로 개발에 제한 기준을 만든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살아보니 그런 마음들이 삶을 조금 덜 경망스럽게 만들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안부가 궁금한 나무가 하나 있다. 역시 어린 시절에 본 나무다. 앞서 설명한 나무와는 이웃한 지역에 있던 나무인데, 오래된 나무도 아니고 그러하니 그만한 위풍은 갖추지 못한 나무이기도 한다. 가운데 공처럼 둥근 매듭이 있는 모양이 독특한 나무인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그 동네에 있는 작은 교회 뒷마당에 서 있었다. 그 옆에 뚜껑이 닫힌 우물이 있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곁에서 아이 엄마가 빨래를 하는 동안 우물가를 돌던 아이가 물에 빠졌고, 그 아이를 건지려다 어미도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 자리에 나무를 한 그루 심었더니 그렇게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란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그런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공처럼 둥근 매듭을 억지로 젖가슴에 비유할 수는 있다 한들 그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그런 사연이 있어 그 나무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 더 전해지고 있었는데, 바로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나무가 울음소리를 낸다는 거였다. 실제로 그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을 또래 중에서도 본 적이 있다.
그 나무도 이런저런 재개발 여파를 뚫고 꽤 오래 살아남았다. 아직도 그 나무를 베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앞서의 느티나무처럼 따로 보호구역을 두어 보존한 것도 아니고, 그 지역 지형도가 너무 바뀌어 그 나무를 눈앞에서 본다 한들 알아볼 것 같지도 않다. 혹여 어느 비 많은 날 그 근처를 지나다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때에나 비로소 알게 되지 않을까.
여느 해보다 다소 늦게 찾아오는 여름이지만, 그래도 날이 더워지니 이런저런 괴담이 들린다. 얼마 전에는 특정종교 단체에서 나눠주는 선풍기를 받지 말라는 SNS 메시지를 받았다. 환각 성분이 있어 사람을 마취시키고 납치한다는 거였다.
요즘의 괴담은 예전에 들었던 것 같은 전설이나 사연은 없는 것 같다. 전설보다는 삶이 더 괴담에 가까워서일까. 하기야 전자발찌를 찬 사람이 아파트에서 여자아이들에게 말을 걸며 배회한다는 구체적인 두려움을 홍콩할미가 무슨 힘으로 이길 수 있겠는가.
<한지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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