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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의 계절이 돌아왔다. 작년 더위를 떠올려보면 벌써부터 올해 여름 날 일이 아득하게 여겨진다. 이런 때는 시원한 소설 하나 읽으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은데, 그런 소설이 있을 리가 없다. 소설은 보통의 삶에 어려 있는 보통의 이야기를 쓴다. 다만 그 보통의 이야기의 바닥에 있는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려고 할 뿐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란 것들이 대개 불안하고, 짜증스럽고, 몹시 걱정스러운 것을 보면 소설이 저 홀로 시원하게 쓰여질 리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죽하면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고 하겠나. 소설보다 더 끔찍한 범죄, 더 말도 안되는 거짓말, 더 어이가 없는 기만이 횡행하니. 그러니, 대신 더 짜증나고, 더 지긋지긋하고, 더 팍팍한 소설을 소개해드리면 어떨까. 한여름에 뜨거운 욕탕에 들어앉으면서도 진심으로 어, 시원하다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게 우리들이니. 그러나 그런 소설들은 좀 더 더울 때, 폭염의 절정을 위해 남겨두기로 한다.
대신에 이야기의 무대를 현실과는 약간 다른 곳으로 확장시켜보면 어떨까. 현실에서는 잘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기묘한 범죄가 일어나는 추리소설도 좋고, 역시 현실에서는 잘 만나지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인연이 있는 로맨스 소설도 좋겠지만, 조금 머리를 써가며 읽어야 할 과학 소설은 어떨까.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작가 테드 창의 신작 소설집이 오랜만에 나와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언젠가도 한번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해드렸던 적이 있는데, 영화 <컨택트>의 원작자이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소설을 쓰는 작가답게 소설의 영역은 과학과 우주를 넘나든다. 만일 소설이 이야기의 외피를 쓰고 정보만을 전달한다면 그것을 좋은 소설이라거나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작가는 과학적 소재를 통해 존재의 근본에 대한 문제를 흔히 제기한다.
예를 들어 세상이 완전한 균형을 이루게 된다면, 그러니까 기압이 완전히 균일해져 흐름이 사라져 버리는 세계가 있다면, 그곳의 생물체들은, 혹은 존재들은 어떻게 되겠는지. 소설에 대해 더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겠다. 게다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이 반드시 소설의 흥미진진함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작가가 의도했거나 말거나, 이 소설을 읽다보니 흐름이 멈춰버린, 혹은 기묘하게 왜곡되어 버린 우리 사회를 문득 생각하게 된다. 어떤 세계든, 어떤 사회든 흐름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권력이든, 기회든, 자본이든, 혹은 개인 간의 관계든 마찬가지다. 이 불균등한 흐름이 불균등하게 멈추지 않은 채 건강하게 흐른다면 그것은 분명히 동력이 될 것이다. 문제는 균등을 가장한 불균등을 선전하는 파워게임들이다. 약자에게 기대 자신이 약자임을 호소하며 선전하는 정치권의 행태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모든 차별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흐른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발언이 나오고, 여성들은 무대에서 엉덩이를 들이밀고, 심지어는 위로랍시고 자기 자식을 자랑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가족들끼리 모이는 명절날에도 하지 않는 일이다. 대체 뭐하시는 분들인가. 테드 창의 소설에서 기압이 사라져 버린 세계는 거대한 돔으로 갇혀 있는 세계다. 안에서 멈추는 순간 더는 소통이 안되는 구조의 세계라는 뜻이다. 그러니 여성 당원들이 그런 춤도 출 수 있었던 모양이다. 위로를 빙자하여 자랑도 하고, 또 위로를 빙자하여 속내를 감출 수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건 소통의 실패가 아니라 의도적인 불통이다.
소설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것은 어떤 세계의 종말이 아니다. 긴장과 소통이 건강하게 유지되는 세계에 대한 희망이다. 자기 안에서 자기끼리 흐르는 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이해를 동반하는 세계에 대한. 대개의 종말 소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종말은 파국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실체로 다가온다. 수많은 경고와 예언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SF 소설에서 보이는 세계는 현실세계와는 많이 다르지만, 은유가 자유롭다는 면에서는 더 통렬하게 현실의 모순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계의 종말을 현실의 파국으로 은유하여 읽으면 좋을 것이다.
이 작가의 소설 중에 <바빌론의 탑>이라는 것이 있다.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인간들. 하늘에 대해 알고 싶은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탑을 쌓아올리는 인간들의 욕망, 혹은 열망, 인간이 갖고 싶은 권력의 의지, 혹은 진실에 대한 추구가 긴박하게 펼쳐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탑이 지상의 꼭대기에 닿아 하늘의 바닥을 뚫게 되었을 때, 인간이 닿게 되는 곳은 어디일까. 마침내 하늘일까. 그렇다면 최초로 그곳에 발을 디딘 인간이 그 순간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폭염이 오기 전에 반가운 소식도 있다. 마침내 누진제가 조정되어 올해는 전기료 염려가 그나마 덜할 듯하다. 세상을 걱정하기 전에 당장 닥친 더위가 더 염려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덜어진 전기료만큼 그 염려도 덜어지겠다. 더위를 잊게 하는 좋은 이야기들이 함께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더위는 잊게 하면서 현실은 더 깊게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김인숙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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