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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시절 심하게 체한 날이었다. 온종일 책상에 엎드려 있다 선배언니를 찾아가 손 좀 따달라고 부탁드렸다. 언니는 옷핀을 구부려 바늘을 손수 제작하고 라이터를 빌려와 소독도 하셨다. 그러더니 내 팔을 붙들고 쓱쓱 쓸어내리기 시작하셨다. 그게 피를 손으로 모으는 동작이라는데 어찌나 어설펐던지, 둘 다 웃음이 나서 바늘을 조준할 수가 없었다. 콕 누르고 “여기 아닌가?” 하며 또 같이 웃고.
안되겠다고, 기다려보라며 언니는 총총 나가셨다. 이윽고 다른 전공 선배오빠가 왕진을 오셨다. 그의 고향인 호남에는 체 내리는 민간요법이 있는데 침술보다도 잘 듣는단다. “체 내리는 게 뭐예요?” 물으니 선배는 ‘일단 엎드려보라’ 하셨다. 등을 동그랗게 구부려 책상에 얹자 그는 빛의 속도로 척추 윗부분을 세게 눌렀다. 오도독 소리가 나면서 얹힌 것이 정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체를 내리고 셋이 둘러앉아 뜨거운 차를 마셨다. 너 지금 온몸이 긴장해 있다고, 왜 그렇게 긴장하며 사냐는 선배의 물음에 머그잔을 쥔 채 울먹하였다. 아파서 옷자락 붙들어도 얼러줄 손은 내 몫이 아니라며 센 척을 했지만, 팔 쓸고 등 눌러준 것은 결국 사람의 손길이었으니까.
곧잘 체하는 체질인 내가 특히 자주 탈 났던 것은 연구조교를 할 무렵이었다. 모교에는 교수연구실마다 조교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중간문을 통해 드나들도록 설계되었다. 나의 지도교수님은 귀가할 때 보통 중간문으로 나오셔서 “나 간다” 알려주셨고, 그러면 조교들끼리 저녁 먹으러 가곤 했다. 하지만 이따금 우리한테 서운하거나 화가 나시면 아무 말씀 없이 연구실 쪽 문으로 퇴근하셨다. 선생님 언제쯤 가실지 기다리다 중간문을 살짝 밀어보면 이미 귀가하신 거다.
나보다 앞서 조교하셨던 선배는 그럴 때면 항의하듯 선생님보다 일찍 간다고 했다. 제자들의 서운함도 좀 아셔야 한다면서 말이다. 한편 후배는 풀릴 때 되면 어련히 풀리실 거라며 대수롭잖게 넘겼다. 선임자의 대담함도, 후임자의 참을성도 갖지 못했던 나는 그때마다 체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저녁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있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달칵, 문 여는 소리에 이어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날 따라 조교실 쪽으로 나오셨던가보다. 하필 왜 그 순간 엎어져 잤을까 자책하던 중 휴대폰 메시지가 울렸다. “연구실 서랍 열어봐. 두 번째 칸 안쪽에 약상자 있어. 거기서 메디락 꺼내 먹어. 배 아플 때 내가 항상 먹는 약이야.”
눈물이 핑 돌았다. 며칠 전 밤늦게 빈 연구실로 잠입하여 오디오 켜고 음악 듣다 노트북 가지러 되돌아오신 선생님께 딱 걸렸고, 그 때문에 화나셨을 것 같았기에 더 그랬다. 약통에서 한 알을 꺼내어 꼴깍 삼키는 순간, “괜찮아” 하는 나지막한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메디락은 알고 보니 위가 아니라 장을 위한 약이었지만 이내 체기가 내리며 열이 가셨다. 순간, 어릴 적 교과서에서 읽은 ‘성탄제’라는 시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혈액 속에 녹아 흐른다던 그 구절.
이 이야기를 하였더니 지인이 애정 어린 목소리로 일렀다. 그런 애틋함은 시에서처럼 너의 혈연, 혹은 향후 네가 만들 가족에게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지도교수가 아무리 자상해도 부모일 수 없고 선배들이 아무리 다정해도 친언니 친오빠는 아니니, 그 애착은 필경 너를 실망시키고 공허하게 만들 거라 하였다. 지인의 조언이 물론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손 따준 선배와는 이제 가끔 안부만 주고받고, 체 내려준 선배와도 연락 안 한 지 한참 되었으니까. 선생님마저 지난 한 해 동안 두세 번 뵈었다.
그 애착은 과연 찰나적이었지만, 나를 실망시키거나 공허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관계의 밀도가 이제와 영원히 동일하지 않다 해서 기억들이 휘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즐거움으로, 고마움은 고마움으로 이제와 영원히 남는다. 핏줄이 아니고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가 아니어도 그렇다. 내 혈액 안에 이 순간 알알이 녹아 흐르는 ‘팔 쓸고 등 눌러준 약손들’과 ‘선생님 서랍 속 메디락’처럼 말이다.
<이소영 |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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