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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아줌마’란 ‘사랑과 결혼’의 문제에서 해방되거나 제외된 여성, 거칠게 말하자면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탈성적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애 키우고 먹고살기 바빠서 ‘사랑 따윈 몰라’라거나 남편을 ‘그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존재임을 가정해본다. ‘아줌마’를 들먹이는 이유는 어떤 계기에 의해 살펴본 지난 시기 ‘여성문학’이 지나치게 로맨스에 치중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에서다.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갈구든, 냉소든 ‘사랑’을 구원의 최종심급으로 둔다는 점에서, 그것은 ‘여자는 뒤웅박’ 팔자라는 속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사랑과 결혼’이 여성의 단 하나의 운명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평에서 벗어난 ‘아줌마’의 삶이란 무엇인가?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를 돌보고 직장에서 또 일하고 늙으신 부모님을 돌보는, 날마다 노동하는 삶이다. 나는 이 섹슈얼리티가 지워진 차원에서의 ‘여성의 노동’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 혹은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저출산’ ‘비혼’ ‘육아시설’ ‘노인돌봄’ 등이 단순히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성을 가정한 ‘노동’ 개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맞벌이 가족’을 이상화하고 있는 현 경제체제가 여성을 끊임없이 유급노동시장으로 호출함으로써 돌봄 공백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경제 생산을 중심으로 한 시장체제가 ‘육아, 노인 돌봄과 가사’라는 사회적 재생산 영역을 잠식함으로써 돌봄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례로 그녀는 현재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미국 IT 업계의 ‘냉동 난자’ 무료서비스 등을 들고 있다. “일단 기다렸다가 40대, 50대, 60대에 자녀를 가지는 걸 생각해봐요. 가장 에너지 왕성하고 생산력이 높은 시절은 우리에게 헌신하세요”라는 제안은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호출하고 가정을 공동화한다. 또한 돌봄노동을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재편함으로써 자본주의 완전 정복을 향해 나아간다. 다양한 형태의 가사도우미, 육아도우미 등의 확산은 돌봄노동의 자본주의화를 보여주는 예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도우미로 대신할 수 없는 ‘아내’ ‘엄마’ ‘며느리’의 자리, 물리적 노동은 물론 종합적 능력, 시간, 애정이 필수적인 이 자리의 공백은 어떻게 메울 것인가.

다시 낸시 프레이저의 논의에 따르면 이 당면한 돌봄문제에 대한 대안에는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대다수 미국 페미니스트와 자유주의자들이 옹호하는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이다. 직장에서의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이 모델은 여성 고용을 증진시킬 수 있지만, 가정에서의 역할을 중시하는 여성에게는 불만족스러운 모델이다. 두 번째는 서유럽 국가가 실천하고 있는 ‘동등한 돌봄제공자’ 모델이다. 이 모델은 여성의 임금노동 현장을 유연화하고 국가가 돌봄수당을 제공함으로써 ‘여성의 육아 역할’을 보장하는 것이다. 차이를 유지하면서 비공식 가사노동을 인정하는 방식이지만 여전히 젠더 불평등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낸시 프레이저가 제안한 제3의 유형은 ‘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이다. 이 모델은 모든 사람을 ‘돌봄’의 주체, 즉 여성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 여성의 생활패턴을 모든 사람이 규범으로 삼도록 하는 것, 즉 생계부양 노동과 돌봄 노동 양쪽을 하고 있는 현재 여성을 보편자로 상정하는 것’이다. 이 비전은 사회 체제를 남성 중심에서 여성으로 이동함으로써 젠더 불평등을 해결할 뿐 아니라, ‘돌봄 공백’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며 해방적이다.

현재 우리가 앓고 있는 ‘여성혐오’에는 다양한 문제적 층위가 놓여 있다. 낸시 프레이저의 말대로 그것은 ‘분배냐 인정이냐’의 단순히 경제적 불평등, 문화적 불평등의 한쪽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한데 엉킨 복잡한 함수문제이다. ‘맘충’이라는 말에 여성비하와 전업주부의 무임금 노동 등이 함축되어 있듯, 젠더 불평등의 해결은 동시적으로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해결을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제껏 ‘남성’을 중심으로 두었던 제도를 ‘여성’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번 ‘개헌 논의’와 더불어 여성주의가 사람들이 지시하는 ‘여성’의 제한된 이쪽 영역에 머물기보다, 경제, 정치, 문화 등의 보다 전면적 차원에서 ‘다른 미래’를 위한 횡단에 나서기를 기대해본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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