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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공감]힐링과 권력

opinionX 2016. 11. 2. 10:52

‘최순실’이라는 이름과 함께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가 하나로 ‘통합’되고 있다. 그야말로 ‘위험이 주도하는 통합’의 양상이다. 콘크리트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던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마저 10%대로 떨어지고, 조선일보를 위시하여 노년층과 영남의 민심도 완전히 돌아섰다. 도심은 다시 손에 촛불을 든 시민들로 가득 차고, 서울발 외신은 ‘주술적 인물에 농락당한 국가수반’과 ‘거리를 메운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 ‘콘크리트 지지층’에게 확산되는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은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지지했던 정서와 구별되기 힘들다는 점에서 착잡한 마음을 일으킨다. 최태민과 최순실 관련 소문은 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이미 퍼져 있었고, 몇몇 인물들은 그러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고 한다. 몇몇 정치평론가들은 그와 같은 문제와 관련하여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초래될 위험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다.

1일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서울 청계광장 인근에 모여 촛불집회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그러나 그러한 모든 미심쩍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또 이후 계속되는 의심과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소위 ‘문고리 3인방’ 등의 측근들을 비호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지금 앞장서서 마치 자신들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모든 책임을 최순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비선 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은 현대판 환관정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최순실은 환관보다는 ‘요승’으로 비유되지만 말이다. 환관정치는 과거 중국의 정치를 부패시켰다. 한국에서도 고려 말에 환관정치가 문제가 되었고, 조선의 역성혁명이 성공한 후 환관은 폐지되고 왕은 늘 ‘공부하는 자세’를 보여야 했다. 국왕은 학자들과의 정례화한 토론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야 했다. 아마도 통치자의 능력과 자세에 대한 이러한 강조가, 식민지와 분단을 거치면서도 한국이 서구 산업사회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내공’의 주요 요소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된 데에는 통치자로서의 능력과 자세에 대한 냉철한 검증보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특히 ‘조실부모한 불행’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이 더욱 크게 작용했다.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주술성’은 충분하다. 그것은 ‘피’에 사회적 능력이 녹아 있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DNA는 많은 정보를 알려주지만, 그것은 물질적 정보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러한 물질적 정보에 의존해 정치권력의 부여를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핏줄 숭배’의 주술일 수밖에 없다.

‘조실부모한 불행’을 가엾게 여긴 지지층의 따뜻한 마음은 이보다 더욱 주술적이다. ‘핏줄 숭배’에는 주술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능력’에 대한 그래도 일말의 기대가 들어 있다. 그러나 불행에 대한 동정심은 환관정치에 길을 내주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능력이 아니라 불행, 즉 ‘상처’가 권력 부여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상처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와 불행에 대한 보상으로 권력이 주어진다면, 거기에는 언제든지 환관의 ‘검은 기운’이 스며들 수 있다. 상처는 권력이 아니라 힐링을 필요로 하는데, 권력은 힐링이 아니라 ‘악용’을 부를 뿐이다. 힐링은 수평적 관계 속에서 자아를 회복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런데 권력은 힐링을 오히려 저해한다.

상처받은 사람에게는 사회적 ‘인정’을 통한 힐링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월호 유가족처럼 난데없는 재난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들은 진실규명을 통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갈구한다. 그런데 이들이 ‘상처’를 빌미로 권력을 추구한다고 비난했던 ‘일베’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간 것인가? 그들은 왜 박근혜 대통령의 ‘상처’를 빌미로 권력을 휘두른 세력들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는 것인가?

홍찬숙 | 서울대 여성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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