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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에선 대통령이 범죄의 몸통이고, ‘비선 실세’가 국정을 농단한 사상 초유의 ‘박근혜 게이트’로 국민들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최순실이 검찰에 출석하면서 “국민 여러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뻔뻔함에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모멸감을 느꼈다는 시민들이 적지 않습니다. “박근혜는 물러나라, 최순실은 하야하라!”는 시위 구호가 ‘신정통치’의 장막을 걷어내라는 ‘정언명령’처럼 들리는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런 ‘최순실의 나라’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뒤 317일간 사경을 헤매다 숨을 거둔 백남기 농민은 영정 속에서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는 ‘물대포 살인’을 저지른 경찰은 백남기 농민 사망 이후 한 달간 온갖 ‘패륜 행위’를 일삼다 시신 부검영장을 재청구하지 않기로 했더군요.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아버지를 광주 5·18 구묘역에 모실 세 남매의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지난달 31일 밤 긴급체포된 최순실씨가 이틀째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1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1998년 세상을 뜬 독일의 소설가 잉게 숄입니다. 히틀러의 폭압정치에 맞서 저항운동을 펼쳤던 대학생 단체 ‘백장미’에서 활동하다 게슈타포에 체포돼 1943년 2월 처형된 한스 숄과 조피 숄의 누나이자 언니입니다. 기억을 되살리고, 자료를 모아 두 동생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기록한 책이 <백장미(Die Weisse Rose)>입니다. 한국에선 1978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제목을 달고 출간됐지요. 당시 한국 대학가에선 ‘아미죽’이란 줄임말로 불렸고, 금서로 묶이기도 했다지요?

남동생 한스와 여동생 조피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것은 24살과 21살 때였습니다. 의사가 되려 했던 한스는 뮌헨대 의대에 들어갔고, 조피는 뮌헨대 철학과에 진학합니다. 자유를 옭아매는 독재권력의 족쇄가 조여오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집단수용소로 끌려가면서 두 동생은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지니게 됐고, ‘백장미’를 결성하게 됩니다. 백남기 농민이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한 뒤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해 유신 독재정권에 항거한 것과 흡사합니다.

1942년 뮌헨대 교정에 ‘백장미’ 문장이 새겨진 전단이 뿌려집니다. 전단에는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무책임하고 어두운 충동에 빠진 통치자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굴욕적인 일은 없다”고 쓰여 있었지요.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던 백남기 농민도 같은 심정이었겠지요. 한 나라의 농민으로서 무책임하고, 어두운 충동에 빠진 통치자에게 굴욕당하지 않으려 차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밧줄을 잡았을 겁니다.

1943년 2월 뮌헨대 건물 3층에서 ‘백장미’ 전단을 뿌리던 한스와 조피는 잠복해 있던 게슈타포에 체포돼 즉결심판에 회부된 지 나흘 만에 단두대에 오르게 됩니다. 처형되기 전 한스는 감옥 벽에 “모든 폭력에 굴하지 않겠다”고 썼고, 조피는 “자유!”라는 글을 새겨 넣었지요. 한스와 조피의 처형 10주기였던 1953년 2월 테오도어 호이스 독일연방 초대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독일의 비극 속에 뛰어든 그들의 행동은 암흑의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반인륜적 폭거를 자행한 박근혜 정부는 사과는커녕 백남기 농민을 능욕하고, ‘병사(病死)’ ‘안락사’ ‘부작위에 의한 살인’ 등을 거론하며 유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당시 상황보고서에 ‘물대포에 의한 부상’ 등으로 적어놓고도 “파기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부검영장이 기각되자 ‘빨간 우의’ 타살 의혹까지 포함시켜 부검영장을 재청구했지요. 나치 체제를 견뎌냈던 저도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70여년 전 나치 폭정에 시달렸던 독일 국민들이 그랬듯이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격 없는’ 대통령이 국가의 근본을 무너뜨려 패닉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수많은 시민들이 “이게 나라인가”라는 장탄식과 함께 ‘하야’ ‘탄핵’을 입에 올리고, 시민사회와 대학에선 시국선언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한스와 조피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해주셨던 “히틀러는 독일 민족을 파멸로 몰고 갈 거야”라는 말이 “박근혜와 최순실, ‘문고리 3인방’이 대한민국을 파멸로 몰고 가는 것 아닌가”라는 불길한 예감과 겹쳐집니다. 지난 주말 전국 곳곳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규탄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아바타 정권 퇴진” “박근혜 하야” 등을 외치며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시민들이 대통령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굴욕당하지 않으려는 간절함 때문이 아닐까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지만 폭력 정권에 희생된 한스와 조피, 백남기 농민이 그토록 바랐던 것처럼….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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